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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Dec 21. 2020

키다리 엄마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후 간식으로 카스테라를 먹고 소파에 누워 살짝 잠든 참이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보니 25개월된 둘째가 나를 바라보며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아빠의 무릎에 안정적으로 안겨있는 정황상 언니와의 물리적 충돌은 아니었다. 휴.


“무슨 일이야? 왜 저렇게 울어?”

“아.... 공룡 때문에.”


며칠 전 산 아이패드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앱을 여럿 깔아놓았다. 그 중엔 AR로 공룡을 눈 앞에 보여주는 게 있었는데 아마 그걸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룡 무서워서 그랬구만. 그니까 그거 뭐하러 깔아서...”

“아닌데. 방금까지 신나게 공룡 무찌르고 있었는데?”

“그럼 왜 울었어?”

“공룡이 엄마를 밟았거든.”


아직 울먹이는 아이의 주위를 끌려 남편은 뽀로로 노래를 틀었다. 첫째는 이제 자기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차례라며 야단법석이다. 둘째는 뽀로로 노래에 정신이 팔려 울음을 그쳤지만 언니가 아이패드를 데려가려(?) 하자 다시 울음을 발사한다. 돗대기시장이 따로 없는 그 순간- 나는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낸 수학자마냥 가슴 한 켠이 뚫렸다. 그리고 그 가슴은 이내 아늑해졌다.


방금 내가 풀어낸 문제는 #키다리 아저씨의 딜레마였다. 드라마 <스타트업>의 한지평 팀장이 쏘아올린 그 딜레마.


한 두달 쯤 되었나. 주말 저녁 손꼽아 보는 드라마가 몇 년 만에 생겼다. 남녀 주인공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스토리도 박진감 넘쳤다. 하지만 그건 유튜브 짤로 본들 아쉽지 않을 딱 그 정도의 매력이었다. 애들 재우는 시간을 바꾸게 할 정도로 나를 끌어들인 건 조연, 한지평 팀장이었다. 서달미를 한없이 위하고 위하는 키다리 아저씨 한지평. 달미가 아픈게 아프고 달미가 기쁜게 기쁜 그의 모습이 주말 밤을 설레게 했다.


처음엔 그저 멋졌다. 잘생기고 능력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드라마가 절반을 넘을 즈음 부터였을까. 드라마를 보고나면 쓸쓸했다. 일하면서 자주 공허하고 외로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럼프에 몇 주를 허우적거리다 알았다. 내 마음을.


나는 키다리 아저씨를 갖고 싶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을 맞닥뜨린 올해, 묵묵히 내 삶을 응원해주는 언덕같은 존재가 내게 너무 절실했던 모양이다. 드라마 속 인물에 이리 감정 이입한 건 단언컨대 1997년 <별은 내 가슴에>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에 한지평 같은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있는다 한들 수지에게 갔으면 갔지 내 몫일리 있나. 하지만 나는 너무 간절히 그가 필요했다. 이게 키다리 아저씨의 딜레마였다.


“엄마!!!!!!”


엄마가 이런 생각의 터널을 지난 것도 모르는 두 딸은 여즉 대치 중이었다. 한 녀석은 아이패드 껍데기를 들고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 1절을 막 시작한 참이고 한 녀석은 상대의 만행을 엄마에게 고하려고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의 키다리들.


일곱살 첫째와 자기 전 많은 대화를 한다. 아이가 오늘 하루 무엇이 제일 좋았는지를 캐묻는 게 내 거의 마지막 일과다. 어젯밤엔 엄마와 카스테라를 만들었던 게 가장 좋았다고 아이는 그랬다. 그 전날은 엄마한테 편지를 쓴게, 그 전전날은 치킨을 먹었던 게 아이의 행복이었다.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다. 꿈나라 티켓 발권까지 마친 아이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이유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엄마가 좋아해서.


첫째는 내가 좋아한 게 좋았고, 둘째는 공룡에 밟힌 내가 아파할까봐 울었다. 나의 기쁨에 그도 기쁘고 나의 슬픔에 그 역시 슬픈 것을 키다리 아저씨로 정의한다면- 난 이미 둘이나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버전으로.


한동안 허전하고 헛헛했던 가슴 한 구석이 이렇게 메꿔졌다. 맞어. 오늘 밤 아이들에게 말해줄 엄마의 행복한 순간은 이거다. 키다리 아저씨의 딜레마를 푼 것. 정답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의 키다리 딸래미들이었단 것.


오늘의 행복한 순간을 실컷 늘어놓고도 아이들이 잠들지 않을 때면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후속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랬구나. 그럼 내일은 뭘 제일 해보고 싶어?”


오늘 아이가 내게 그걸 되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해야지.


“엄마도 내일도 모레도 우리 딸들의 키다리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 기쁨이 기쁘고 슬픔이 슬픈. 그래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세살 둘째는 언니 이불을 빼앗는데 정신이 팔려 있을거다. 그나마 엄마 말에 귀를 귀울여주는 일곱살 첫째도 ‘키다리? 엄마는 키가 크고 싶은가보군. 그러려면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할텐데...’ 정도의 생각을 해주면 다행.


하지만 언젠가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어 혼자라는 생각에 헛헛해지는 그런 밤에- 불현듯 엄마의 키다리 타령을 떠올리게 된다면 좋겠다. 나의 기쁨이 기쁘고 나의 슬픔이 슬픈 사람이 너희들에게도 있단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의 키다리 딸래미들,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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