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상무기가 업적이 되는 정직한 야만의 시대
아나운서의 말_
살상무기가 업적이 되는 정직한 야만의 시대
바야흐로 K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다.
K-팝, K-패션,K-뷰티, K-푸드... 미군 PX에서 물건을 떼다가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팔던 ‘미제 아줌마’의 행상 보따리에 담긴 제품들이 그저 신기했던 세대에게 K브랜드의 약진은 천지개벽수준의 세상 변화리라. 중국 관광객들이 하나씩 안고 돌아간다는 K-전기밥솥을 보며 일제 코끼리 밥솥이 엄마들의 로망이었던 시절이 겹치며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게 된다.
아무튼
제품이나 문화의 앞에 붙는 K라는 단어는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국뽕까진 아니어도 자부심이 넘쳐나는 시절인데 최근 몇 년 사이 떠오르고 있는 또 다른 K가 있으니 세계 무기 시장에 불고 있는 K-방산 바람이다.
요즘 뉴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K-방산 수출 소식이 흘러나온다.
포털 검색어에 K-방산이란 단어만 넣어보아도, 혹은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보아도 ‘자랑스러운 수출역군’K-방산 소식이 넘쳐난다.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무기 수출 세일즈맨 역할을 자처하고 방산업체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어느 나라에 무기를 얼마나 수출하기로 했다는 정부의 발표 때마다 우리는 국뽕에 휩싸인다.
살상무기가 장사가 된다는 건 세상이 불안정하다는 방증이다.
우리나라가 살상무기 생산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사실 전쟁의 아픔과 강대국에 둘러싸인 아찔한 지정학적 주변 현실이 바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경험했고 주변 환경 속에 생존에 대한 본능, 게다가 ‘빨리빨리’라는 말을 세계에 수출할 정도로 사람을 갈아 넣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더해지니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축약된 기술 발전과 속도감 있는 생산은 불안을 가중시키는 세계 정세에 영합해 K-방산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수출역군 K-방산의 원조이자 스테디셀러는 <최루탄>이다.
세계시장에서 한국산 최루탄의 명성은 예전부터 자자했는데 최루탄은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자극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수단이며 혹자는 이런 목적성 때문에 최루탄을 비살상무기라 말하지만 일종의 화학무기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루탄에는 CS가스와 CN가스 두 종류가 있는데 더 독한 CS가스는 군용, CN가스는 민간대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까지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즉 민간 시위대를 적으로 본 것이다!)
오랜 군사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최루탄 제조 기술이 발전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을 것이다. 저항이 커질수록 최루탄의 독성도 함께 커졌는데, 독한 한국산 최루탄의 명성은 세계시장(대부분 독재국가들)에 소리 소문 없이 퍼졌고, 심지어 필리핀에서는 구매를 위한 체험 사절단이 온 적도 있었는데 독성에 너무 놀란 나머지 “우리같이 더운 나라에서 이 제품을 사용하면 견디지 못하고 사망할 것”이라며 수입을 포기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디펜스21플러스 인용>
민주화 이후에도 시위 현장에서 꾸준히 사용되던 최루탄은 1998년 만도기계 총파업 사태 이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갈 곳을 잃은 최루탄은 본격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한다.
(사실 이전에도 꾸준히 수출되어왔으나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총 316만발이 수출됐던 최루탄은 2023년에는 한해에만 158만발가량이 수출되었는데 주요 수출국은 이라크,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라위, 방글라데시, 미얀마등 이었다.(어떤 상황의 국가들에 수출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겠다. 최근에는 한국산 물대포의 수출도 이뤄지고 있다.)
이렇게 원조 K-방산, 최루탄의 수출은 오랜 시간 이뤄지고 외화를 벌어들였지만 그리 자랑스럽지는 않았던지 업적 자랑에 사용되지는 않았었다. 다른 무기 수출도 마찬가지였는데 제3세계로의 살상무기 수출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지만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불문율이었다.
(자 여러분 우수한 한국산 무기 써보세요. 효과적으로 싼값에 많이 죽일 수 있습니다......)
이런 불문율이 사장되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이다.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풀린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에 침투하며 전례 없던 양극화가 진행되던 시기, 너도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수많은 도덕성의 문제(주로 경제 관련)를 안고 있던 이명박 서울시장을 대통령으로 탄생시켰는데 이는 위선적일지언정 도덕이 우선시되던 시대는 가고 부에 대한 욕망 표출이 부끄럽지 않은 시대로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살상 무기 수출자랑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며 이는 이후에는 민주정부건 보수정부건 가리지 않고 방산을 정권 업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다.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
K라는 단어로 포장된 방산은 결국 본질은 살상 무기다.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무기를 수출하면서 우리는 부를 획득하고, 획득한 부를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혁신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이문영 교수)는 말이 가슴에 묵직하게 와 닿는다. -전지적 시점-
테라피스트의 말_
정직한 야만의 시대, 잃어버린 감수성
힘이 자랑이 되고, 살상 무기가 산업 역군으로 불리며, 국가의 성취라는 이름 아래 불편함이 사라져가는 시대.
그 서늘한 현실을 아나운서님 글을 따라가다 보니 마음이 멎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곧 선(善)”이라는 믿음에 익숙해졌을까요.
한국 사회의 집단심리는 오래전부터 ‘약해지면 안 된다’는 공동의 정서를 품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상처, 분단이라는 끊임없는 긴장, 군사문화와 독재의 폭력, 그리고 숨 가쁘게 달려온 경제성장의 역사까지. 이 모든 경험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스키마를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정서를 집단자부심(collective pride)의 토대로 봅니다.
집단자부심이란, 집단의 성취와 강함을 통해 개인이 심리적 안정과 자존감을 얻는 감정 구조인데, 아마 한국의 집단자부심은 “우리는 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는 역사적 기억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약하면 안 되고, 뒤처지면 안 되고, 또다시 뺏기지 않기 위해 강해야 한다는 마음. 약했기 때문에, 아팠기 때문에, 흔들렸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켜줄 ‘강함의 서사’를 더 강하게 찾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 자부심이 지나치게 뜨거워질 때입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환호하는 순간, 우리는 불편해야 할 질문을 놓치곤 해요.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커질수록 자기 의심은 사라지고, 그 자부심은 어느새 집단사고로 이어지기 쉬워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불편함 대신 무감각이, 윤리적 고민 대신 합리화가 우리 안에 들어앉기 쉬워집니다. 살상 무기조차 ‘국가적 성공’, ‘세계가 인정한 기술력’, ‘우리의 자부심’이라는 포장 속에서 점점 더 쉽게 소비되는 이유이겠습니다.
곽민수 작가의 그림책 《아주아주 센 모기약이 발명된다면?》을 보면, 강한 것이 항상 옳은 해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태계 이야기를 통해 보여줍니다. 모기를 없애겠다는 단순한 욕망에서 시작된 ‘더 강한 모기약’은 사람들을 잠시 안도하게 만들지만, 결국 더 크고 더 위험한 문제와 혼란을 불러와요.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초강력 모기약은 모기뿐 아니라 도마뱀과 고양이까지 사라지게 만들고, 결국 쥐 떼가 들끓게 되자 사람들은 또다시 ‘더 센 해결책’을 찾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잡은 것은 새로운 무기가 아니라 고양이였죠.
이 장면은 지금 우리가 방산 수출에 환호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더 강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강함이 어떤 균형을 무너뜨릴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은 묻습니다.
“우리는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더 큰 문제를 키우고 있는 걸까?”
무기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주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의 불안과 욕망을 덮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의 ‘강한 모기약’인지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이겠습니다.
아나운서님이 글 말미에 적으신 이문영 교수님의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많이 머뭅니다.
힘이 자랑이 되는 야만의 시대일수록 ‘더 큰 힘이 답’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공감적 감수성, 그리고 사회의 균열과 불편한 진실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사회적 감수성이 아닐까요.
그러니 강함을 증명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강함이 무엇을 빼앗아가고 있는지를 잠시 멈춰 바라보려는 단 한 번의 망설임일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멈춤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의 자리를 다시 찾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힘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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