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 동양최대.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Turn Off The T.V. (N.EX.T 1992년)
아나운서의 말_현대판 공덕비 랜드마크, 종묘에 철학과 맥락을 허하라!
인간은 권력을 갖게 되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랜드마크를 만들려 한다.
거대한 건축물위에서 대중을 내려 보며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은 인류 역사이래 지속되어온 속성이다.
인류 최초의 랜드마크를 꼽는다면 아마 바벨탑이 아닐까.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창세기에 기록되어있는 이 한마디는 랜드마크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권력자가 백성을 동원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반란을 막고 권력을 유지 혹은 재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랜드마크 건설만큼 좋은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시절에 건설된 수많은 거대 신전과 경기장은 권력자의 힘을 과시하며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고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전설적인 상징화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의 시대(중세)에는 거대한 교회건축물이
속속 세워지며 신의 권위에 기대 자신들의 힘을 공고히 하려는 권력자들의 의지가 랜드마크에 담겼다.
랜드마크에 대한 욕망은 현대에 들어서도 변함없는데 권위주의적 정부의 경우 권력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대중을 가스라이팅 하고 억압하기에 거대 건축물의 건설만큼 좋은 수단은 없으며 민주화된 국가들조차 단기 계약직인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재창출하기 위한 업적과시의 수단으로 거대 랜드마크를 건설하고픈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기 마련이다.
물론 랜드마크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철학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면 지역을 상징하는 대표명소로서
‘멀리서도 눈에 띄는 지형적 물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나 조형물 또는 자연경관을 의미한다.’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엔 사전적 의미보다 권력의 욕망에 충실한 혹은 과시형의 랜드마크를 건설하려는 불행한 시도가 종종 등장하는데
필자가 살고 있는 제주도에 2011년 100억 원을 투입해 건물 10층, 40미터 높이의 거대 해녀상을 세우겠다는 발표가 났던 적이 있다.
제주도는 당시에 ‘거대 해녀상 건설이 제주해녀의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 관광 명소화 하는 사업이며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항구의 랜드마크이듯, 초대형 제주해녀상을 통해 (제주)동부지역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해 관광 명소화 하고 지역경제에도 기여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바 있다.
(관련뉴스 https://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01446)
물론 이 사업은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해녀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보존, 활용 가치가 대단한 제주의 유산, 인류의 유산이지만
제대로 된 콘텐츠 없이 대형 조형물만 짓는다고 랜드마크가 될 수 있겠느냐는 반대가 들끓었고,
대형 건축물만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이런 철학 없는 과시성 건축 계획에 민심은 등을 돌렸고 결국 계획을 철회해야만 했다.
이 외에도 제주에는 종종 거대 랜드마크 건설 계획이 발표되곤 하는데
서귀포 예레동에 말레이시아 기업인 버자야 그룹을 끌어들여 높이 240미터에 달하는 50층짜리 호텔과 주거단지를 짓겠다던가 (복잡한 스토리가 있지만 토지수용이 불법이었다는 판결에 공사가 중단되어 현재는 폐허처럼 방치되어있다)
제주시 노형동에 세워진 38층, 169미터 높이의 드림타워는 당초 56층, 218미터로 계획되었지만 수많은 반대 속에 결국 규모를 축소해 건설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제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2025년 현재 건축규제를 풀어 제주도에 드림타워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이 추진중이다.)
어찌 보면 한라산 자체가 랜드마크인 제주도에서 천연의 랜드마크인 한라산을 가리는 인공 랜드마크를 세우겠다는 이들의 발상을 보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가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도시 디자인에는 철학과 맥락이 담겨야 한다.
광화문 광장에 높이 100미터에 달하는 태극기를 세우겠다던가, 동대문의 역사성과 주변조화에 전혀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 DDP건설 ,시장이 바뀔 때마다 공사 몸살을 앓는 광화문광장은 지속가능성을 고려치 않는 철학의 빈곤을 보여준다.
600년이 넘는 시간, 종로 뒷골목을 지켜온 서민들의 골목 피맛골은 대규모 재개발을 거쳐 고층건물 사이 상가 건물 간판의 명칭정도로 전락해 버렸는데 당시 골목을 유지하면서도 재개발을 할 수 있다는 수많은 건축가와 학자들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는 ‘디자인 서울’이라는 구호 속에 일축되어 600년의 추억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복원사업이라던 청계천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통령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업적 마련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며 복원이 아닌 랜드마크 개발 사업이 되어버렸다.
“청계천 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맹세코 정치적 목적을 떠나 이 대역사를 진행하고 있는지…만일 정치적 의도 때문에 업적에 연연하여 공기를 앞당긴다면, 추호라도 이해(利害)라는 굴레에 매달려 방향을 개발 쪽으로 튼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찧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
<소설가 박경리 동아일보 기고 2004년3월>
청계천 복원사업에 힘을 보탰던 박경리 선생의 기고문에는, 이명박 시장 본인 임기 내에 건설을 완료해 랜드마크 치적으로 삼고자, 쏟아져 나오는 유적과 유물을 서둘러 덮어버리고 소중한 문화유산 청계천을 거대한 인공분수(세계적 건축학자 로돌프 마차도의 평)로 재개발하는 사업으로 전락시켜버린 천박함에 대한 분노와 피를 토하는 심정의 후회가 담겼다.
2025년 겨울
우리는 세계문화유산 종묘와 연계된 또 하나의 랜드마크 개발 사업을 마주하게 된다.
1967년 완공된 세운상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당시 ‘서울의 랜드마크’로 불렸던 건물이었다.
워낙에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재개발 이슈는 계속되어 왔는데 이미 저층을 유지하기로 합의된 재개발 안이 있음에도 높이를 최대 140미터까지 올릴 수 있는 고층개발을 서울시가 새롭게 추진하면서 인접한 세계유산 <종묘>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녹지축이니 경관훼손이니, 역사성 파괴니 재산권보호니 여러 갑론을박이 난무하지만 철학과 맥락의 부재는 위의 사례들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세운지구 내 새로운 랜드마크와 남북녹지축이 조성된다면 종묘의 문화재적 가치와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서울시의 설명에도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랜드마크 조성의 철학과 목적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철학 없는 랜드마크, 철학 없는 도시 디자인은 단순개발이상의 의미가 없다.
랜드마크는 모두의 공감 속에 붙일 수 있는 명칭이지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 한권 읽은 사람'이라 했다.
부디 우리의 역사이자 인류의 역사 그리고 정체성을 다뤄야 하는 일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계 전문가의 의견, 수많은 논쟁과 토론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거쳐 대중의 공감을 바탕으로 역사를 진행하기 바란다. (발주자의 입맛에 맞는 결과만을 도출하는 얼치기 용역전문가와 어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장이 바뀌고, 도지사가 바뀌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빈곤한 철학으로 변해버린 광장, 새로운 동상을 보는데 지쳐가고 있다.
철학과 맥락 그리고 역사를 갖춘 지속가능한 도시에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세금 내는 유권자의 거창한 욕심은 아니지 않은가.
-전지적 시점-
테라피스트의 말_
보여지는 시대의 미혹, 본질의 힘을 다시 세우리라!
아나운서님이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과시와 랜드마크의 욕망을 이야기 하셨다면, 저는 이 주제를 우리 일상 속 ‘보여짐’의 문화로 풀어내 봅니다.
도시가 거대한 조형물과 건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로고와 명품, 브랜드 이름과 화려한 포장으로 나를 조금 더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마주합니다. 어쩌면 거시와 미시의 풍경은 다르지만, 그 속을 흐르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마음을 ‘이상적 자아’와 ‘실제 자아’의 간극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크고 단단한데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할 때, 그 간극을 외적인 상징물로 채우려는 경향이 생기죠. 도시 위로 솟은 거대한 구조물도, 우리가 손끝에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도 그런 인간의 한 단면을 담고 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것”으로 보여지는 무언가를 통해 부족함을 숨기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얼마 전엔 디올 핸드백이 50달러대 생산비로 만들어졌음에도 수천 유로에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상품 표면에 붙은 이름 하나가 본질의 가치를 얼마나 압도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이런 풍경은 한국 아파트 이름에서도 반복됩니다.
어느 한국 유학생의 소포 주소에 적힌 ‘롯데캐슬’을 보고 현지인이 놀란 듯 “너 정말 캐슬에 살아? 너 왕자야?”라고 물었다는 이야기처럼요.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브랜드가 다른 시선에서는 문자 그대로 ‘성(城)’으로 읽히는 아이러니. 겉모습이 본질을 덮어버리는 시대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소윤경 작가님의 〈호텔 파라다이스〉가 떠오릅니다.
제목처럼, 그림책의 표지를 보고 있으면 정말 낙원에 온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인도의 화려한 리조트에서는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고, 럭셔리한 수영장에서는 관광객들이 더위를 식히며 여유를 즐깁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시선은 리조트 너머로 향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낙타와 코끼리, 다정한 현지인 가족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 뒤로는 개발 중인 공사장과 길을 잃은 원숭이 떼가 가득합니다.
멀리서 보면 완벽한 낙원 같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는 공간.
결국 사람을 붙잡는 건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머물 이유, 관계가 남기는 온기, 그리고 시간을 견디는 본질임을 그림책은 말합니다.
아나운서님의 말씀처럼 도시가 철학을 잃으면 랜드마크는 그저 거대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상에서도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왜 그것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이유, 규모나 가격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맥락, 화려하고 반짝이는 이름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본질을 바라보는 마음.
이 모든 것을 잘 간직한다면 도시가 맥락을 잃지 않아야 하듯, 우리의 일상도 본질을 잃지 않을때 비로소 오래도록 사람답게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다짐합니다.
빨리 올린 건물보다 천천히 쌓아 올린 관계가 더 단단하고, 번쩍이는 로고보다 작지만 진심인 마음이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말입니다.
겉모습이 도시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세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결국 도시든 일상이든, 오래 남는 것은 언제나 철학과 본질이라는 것을 믿으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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