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혁명은 사회적 진보일까, 사회적 비극일까

by 전지적 시점

아나운서의 말 _ AI혁명은 사회적 진보일까 사회적 비극일까


어린 시절 미래의 모습이라며 TV 뉴스에서 전해주던 풍경이 있다.

아침이 되면 알람과 함께 자동으로 커튼이 열리고 침대는 자동으로 화장실과 부엌으로 이동한다.

인간은 그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인공지능 로봇이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하며 그 시간에 틀어주는 TV속 뉴스를 시청하고 그제야 몸을 일으켜 로봇이 챙겨주는 옷을 입고 문 앞에 나서면 자율주행 자동차가 인간을 태워 직장으로 향한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컴퓨터 앞에 앉아 AI로봇의 업무를 프로그래밍하고 그 로봇들은 건설 현장에서, 식당에서, 혹은 마트 에서 인간의 일을 대신하며 여유가 넘치는 행복한 인류의 미래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런 꿈같은 미래가 그리 멀지 않았다며 진지하게 말하는 앵커의 모습에서 우리는 육체노동에서 해방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워라벨을 누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봤던 것 같다.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 이정문 화백(1965년작)


그런데 그리던 미래는 다가왔지만 예상과 사뭇 다른 미래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한 채 잡다한 육체노동을 인공지능 로봇에게 맡길 것이란 그 시절의 예상은 빗나가고 오히려 단순 육체노동이 살아남고 전문 고급인력의 일을 AI가 대체해 가는 다소 예상과는 다른 미래 세계가 현실에 펼쳐지고 있다.

당시 미래의 모습이라며 진지하게 소개하던 TV속 뉴스 앵커는 ‘사람’이었지만 현실이 된 미래의 뉴스 앵커는 AI로 대체되고 있다.

프로그래밍된 AI 앵커에게는 메이크업, 의상 담당자가 필요 없고, 카메라 감독도 필요 없으며 조명과 오디오 등 보조할 여러 인력도 필요치 않다. 심지어 이들을 총괄할 PD도 필요치 않으며 그들에게 줄 월급도 필요치 않다.(월급이 AI구독료로 대체된다. 저렴히...) 단지 뉴스를 입력할 담당자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한데 앞으로는 이 한 명 조차 글쎄...(기사도 AI기자가 만들어내며 만들어진 기사에 CG작업과 중요도, 선별도등의 알고리듬을 설정해두면... 필요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뉴스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15명 에서 20명 정도의 숙련된 인력이 스튜디오에서 사라지게 된다.


영화제작현장은 더 심각하다.

미국의 경우 작가노조와 배우노조의 대규모 파업으로 잠시 미뤄뒀을 뿐 영화 시나리오를 AI가 쓰고, 몇몇 주연배우를 제외한 조,단역들은 AI작업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주연배우의 어린시절도 AI작업으로 구현하면 아역이 필요 없어진다. (아이리시맨에서 '디에이징'이란 기술이 활용되었다.)

디에이징 작업으로 구현한 로버트 드니로의 30대와 80대.

영화와 뉴스를 예로 들었지만 각종 산업현장에서 사라지는 휴먼들은 과거 TV에서그렸던 희망찬 미래처럼 노동에서 해방돼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자본은 늘 평범한 다수 인간의 편은 아니었다)

200여년전 일어났던 산업혁명 당시에는 기계에 일자리를 잃은 인간이 기계를 부수며 "여기 사람이 있어요"라고 절규 했지만 절대적 부를 지닌 권력에 의해 결국 진압의 형태로 마무리되었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반동적 파괴를 벌인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교과서속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다만 노조 설립과 단체 행동권을 인정받고 민주주의 확대 시기와 맞물려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지만 과도기적 희생을 감내해야했던 평범한 이들의 고통과 그 역사적 의의를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200년전의 산업혁명 당시에도 일자리를 잃었던 이들은 숙련된 고급 노동자들이었고 AI가 대체하는 현재의 인력도 숙련된 고급 노동자들이다. 심지어 AI를 창조한 프로그래머들의 자리를 AI가 대체하고 있다는 소식도 쏟아진다.(마이크로소프트사의 올해 해고자는1만5000명, 신입프로그래머 채용은 0명이다)

예상치 못한 미래가 펼쳐지고 적응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급속한 변화에 한동안 사회적 진통은 계속 될 듯 하다.

200년전의 그때처럼,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삶을 위협받는 평범한 이들의 우려에 대해 혁신에 저항하는 고인물 취급하는 자본가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놀랍도록 유사한 200년의 시차, 반복되는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AI 혁명의 시대.

우리 인류는 인간성을 잃지 않으며

또다시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 갈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이 사회적 비극이 아닌 사회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을까?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류에겐

견뎌낼 위로와 슬기롭게 그려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AI로 퇴출되는 인간의 모습을 AI가 그리도록 하니 더 섬뜩하다...>


그림책테라피스트의 말- AI시대, 대체 불가능한 ‘나다움’


어린 시절 보던 〈우주 소년 아톰〉이 떠오릅니다. 인간의 마음을 닮아, 누구보다 따뜻하게 세상을 지키려 했던 로봇 소년. 그때는 단순히 신기하고 멋진 상상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인간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방송국의 위기를 다룬 내용을 보며, 저 역시 마음 깊이 공감했습니다. 특히 직장인이란 언제나 사회 변화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존재이지요.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불현듯 닥쳐오는 전환의 시점- 해고, 이직, 부서 이동 같은 순간 앞에서는 몸과 마음이 함께 지치고, 삶의 균형마저 쉽게 흔들리곤 합니다. 지금은 그 전환의 파도가 ‘AI’라는 이름으로 더욱 거세게 밀려와, 우리 모두를 불안 속에서 흔들리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듯 합니다.


부모 교육 현장에서도 시대의 변화를 체감합니다.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님께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 (장난감이나 풍선 따위의 것들)을 놓쳐 떼를 쓴다면 어떻게 하시나요?” 라고 물으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이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환기시킨다”는 말씀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늘 하루만 코~자면 쿠팡 새벽 배송이 가져다 줄 거야”하면 해결이 된다고 하시더군요. 부모 교육장이 어느새 빠른 배송과 쿠팡의 편리함을 이야기하는 자리로 바뀌어 가는 풍경 속에서, 교육 현장 또한 이렇게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상담 현장에서도 요즘은 많은 이들이 AI 에게 먼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고 하죠. 하지만 실제로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서는 상담을 받을 때 ‘AI만으로 충분하다, AI와 사람을 반반 섞는 것이 좋다, 사람에게만 상담받는 것이 좋다’ 라는 세 가지 선택지를 두었는데, 가장 높은 선호를 받은 것은 ‘AI와 사람을 반반 섞는 상담’이었습니다.사람만으로도, AI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결국 인간이 원하는 건 효율과 편리함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의 온기와 AI의 어우러지는 균형이 아닐까요.


이 생각은 종교 현장에서도 확인됩니다. 어느 신부님과 나눈 대화에서 “요즘 젊은 신부님들도 혹시 AI로 강론 쓰기의 도움을 받지 않나요?” 라고 묻자 말씀하시더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강론에는 결국 자기 삶의 경험과 성찰, 신념과 철학이 담겨야 해요. 그래서 쉽지는 않아요.” 도구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살아온 삶과 사유의 결만큼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경험과 이야기, 그 안에서 피어난 의미야말로 고유하게 남아 있는 세계일테니까요.


아나운서님의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류에겐 견뎌낼 위로와 슬기롭게 그려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는 말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물음표처럼 다가옵니다.

그림책 《도시 해킹》은 그 답의 실마리를 찾아줍니다. 모든 인터넷망이 끊겨버린 도시에서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하고 무력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집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들은 흙을 만지며 놀고, 누군가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기다림의 설렘’을 되살려냅니다. 빠름과 효율이 멈춘 자리에서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온기와 삶의 결이 드러난 것이죠.


AI 시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책 《도시 해킹》 속 사람들이 빠름과 연결이 끊어진 자리에 오히려 더 인간다운 감각을 발견했듯이, 기술이 삶을 위협하는 듯 보일지라도 인간은 언제나 불편함 속에서 길을 찾고, 공허함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린 존재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한 ‘인간성’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각자가 살아온 경험과 이야기를 엮어 만든 ‘나다움’ 일 것입니다.

자신의 ‘나다움’을 세상의 필요와 연결해 차이와 공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람. 저는 그것이야말로 AI 시대에 다시 정의해야 할 인간다움이고, 우리가 새롭게 리셋해야 할 지점이겠습니다.

희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무망감(無望感)! 더는 기대할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희망이란, 어쩌면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다시 가능하다’는 끈을 붙드는 힘이 아닐까요.



눈앞의 현실이 우리의 뜻과 다르게 흔들릴지라도,

희망은 결국 ‘인간다움’ 과 ‘나다움’에서 태어나

우리를 지혜롭게 이끌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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