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ade in heart

비틀즈와 함께 보낸 시간

음악과 향기에 마음을 섞어 만든 이미지들

by 윤만세

2016년, 매달 네 가지 새로운 향을 출시하는 파펨의 6월의 향에 아티스트로 참여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파펨은 가까운 친구가 당시에 몸담고 있던 회사였습니다. 향 구독 서비스로 매달 새로운 향이 출시될 때마다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지인 찬스로 저에게도 기회가 왔던 것이지요. 협업방식이 물물교환에 가까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 일 외에 마음대로 작업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 흔쾌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별로 고마워하지는 않더라고요.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첫 미팅에서 향 샘플을 받고 매우 신났던 기억이 납니다.


첫 미팅. 친구 셋이 카페에 모임


작업은 아래와 같은 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각 향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에 어울리는 음악을 정한다.

관련된 짧은 글을 쓴다.

향 이름을 정한다.


글과 이미지, 음악 모두 마음대로, 심지어 향 이름까지도 제가 정하는 거더라고요.(야호) 향에 어울리는 이미지와 음악과 글, 어떤 것을 먼저 할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작업자 마음대로였어요.


처음부터 저는 비틀즈를 주제로 정했습니다. 향이 네 개였고 비틀즈도 네 명이니 완전 딱이라고 생각했죠. 향과 어울리는 네 개의 풍경과 네 사람, 하지만 연결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A day in the life'처럼 들을 때마다 무한 감탄하게 되는 비틀즈의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비틀즈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 듣다 보니 이미 알고 있던 음악의 새로운 버전을 발견하기도 하고, 몰랐던 뒷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했어요. 기타를 치던 폴 매카트니가 마지못해 베이스 주자가 되었다던가, 경쟁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하면서 레논-매카트니 콤비가 탄생했다던가, 그 둘에 가려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조지 해리슨이 얼마나 열 받았을지, 사람 좋기로 유명한 링고 스타 덕에 해체 직전의 밴드가 그나마 조금 더 유지될 수 있었다던가 하는 등등이요. 멤버들의 속내나 인간적인 면모까지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지요.



6월은 봄이라고 하기엔 덥고, 본격적인 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한 계절이잖아요.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콘셉트로 꿈과 현실이 뒤섞인 풍경을 그리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비틀즈의 음악도 그렇거든요. 듣다 보면 이런 말이 절로 튀어나와요.


이건 뭐야???????


카드 4개를 붙여놓고 배경 먼저 구상했습니다. 따로 보면 전혀 다른 넷이지만 하나로 연결되었으면 해서 가로로도, 세로로도 연결해보고 정사각형으로도, 마름모로도, 지그재그로도 붙여보았는데.. 억지스럽지 않게 배경을 연결하는 작업은 꽤나 어려웠어요. 제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조합은 모두 시도해보았답니다.


풍경 네 개 하나로 연결 중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고생 좀 했지만, 결국 이미지는 세로로 연결하기로 했습니다. 포기한 건 아니고요.. 머릿속 이미지를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배경을 어느 정도 완성한 시점에 비틀즈가 비틀즈를 연기한 'A Hard Day's Night'이 갑자기 개봉했습니다. 국내 최초 개봉이라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접했는데 순간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 보라고 개봉하는 건가!'싶었거든요. 바로 예매하고 개봉 첫날 당장 보러 갔죠.


저 보라고 개봉한 영화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기본 설정과 스토리가 있긴 했으나 멤버들의 캐릭터가 실제와 같이 생생한 탓에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같았어요. 찾아보니 비틀즈의 순회공연에 동행하면서 멤버들을 관찰한 작가가 각자의 개성을 시나리오에 그대로 반영했다고 하더군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마지막으로 상영관을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비틀즈를 그리자


'It's been a hard day's night and I'd been working like a dog(정말 힘든 하루였어. 하루 종일 개처럼 일만 했지.)'라는 가사가 나올 정도로 빈틈없는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던 초기부터, 투어를 전면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 실험에 집중했던 후기까지. 비틀즈는 그야말로 격변의 밴드였기 때문에 어떤 시기의 모습을 담는 것이 좋을지가 계속 고민이었거든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초기 비틀즈의 시그니처인 단정한 머리와 슈트 차림으로 각자의 악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기로 결심하면서 작업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향을 맡으면서 각각의 풍경 속에 누가 있으면 어울릴까 상상하면서 작업했는데 존, 링고, 폴, 조지, 이렇게 우연히 Abbey Road의 횡단보도 건너는 순서대로 되었습니다. 이미지는 세로로 연결되고 4번 카드를 맨 위로 올리면 다시 1번과 연결됩니다.


무한 루프라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


향 이름도 고민 없이 존, 링고, 폴, 조지로 정하고 BGM도 모두 비틀즈의 곡으로 골랐어요. 딱 네 곡만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 비틀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들입니다.


1. John : #9 dream
청량하고 시원한 향이라서 날고 있는, 어쩌면 헤엄치는 것으로도 보이는 존 레논을 그렸습니다. '#9 dream'은 비틀즈 해체 이후 존이 솔로로 발표한 곡입니다. 꿈속에 있는 듯한 몽환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인상적인데, 실제로 존이 꿈을 꾸고 일어나 슉슉 만들었다고 해요.


2. Ringo : Norwegian Wood
'Norwegian Wood'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으로도 유명하고(한국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출판) 그 해석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죠. 가사에 대한 해석이나 존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대단히 막장이긴 합니다. 하루키는 <잡문집>에서 이 곡에 대해 '애매모호함이 선사하는 불가사의한 심오함'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그 심오함이야말로 이 곡의 생명이라고 견해를 밝혔는데요. 그런 자세한 배경까지는 모르겠지만, 울창한 숲에 느긋하게 누워있는 링고 스타에게 불어올 것 같은 바람의 향이라서 저는 이 음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럼까지 그리기엔 무리가 있어 드러누운 링고의 배 위에 드럼 스틱만 올려뒀어요.


3. Paul : A Day In The Life
묘하게 따뜻한 향이라서 거짓말 같은 풍경 속의 폴 매카트니를 떠올렸고, '이상한 날의 폴'이라는 부제도 붙여보았어요. 이 곡은 존의 미완성 곡에 폴이 멜로디를 덧붙여서 완성했다고 하는데, 두 곡이 오케스트라로 연결되는 부분이나 자명종 소리같은 다양한 장치들이 어루러져 정말 어매이징 크레이지.. 해요. 소설로 치면 줄거리가 여러 갈래로 마구 펼쳐지다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다시 합쳐졌는데 반전으로 끝나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쿠키 영상이 나오는, 뭐 그런 식이에요. 처음 들었을 때 "이건 뭐야?????"를 외쳤던 바로 그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이야말로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분위기의 결정판이라서 묘한 하루, 묘한 느낌엔 이 곡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어요. 왼손잡이인 폴이 베이스를 어떤 방향으로 매야 하는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답니다.


4. George : Here, There And Everywhere
향을 맡으며 혼자 조용히 기타를 치는 조지 해리슨을 상상하니 자연스럽게 이 곡이 떠올랐습니다. 폴이 만든 곡인데, 존과 조지의 하모니가 더해져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에요.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폴이 만든 곡에 대해 웬만하면 인정 안 하는 존도 이 곡은 마음에 들어하고 칭찬했다고 해요. 그러니까요, 인정 안 하기 쉽지 않은 곡입니다.


다시 회사원이 되어 일하던 때라 주말에 몰아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는데, 애청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주말 코너 '아티스트 미니 스페셜'에서도 이 시기에 비틀즈 편이 몇 주에 걸쳐 방송되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노을빛으로 빨갛게 물든 방 안에서 배철수 아저씨가 소개하는 비틀즈의 멋진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행복했어요. 영화 개봉도 그렇고, 타이밍이라는 건 참 신기하고 대단합니다.


6월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출시된 파펨 향수


6월은 애매한 계절이라고 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콘셉트가 낮도 밤도 아니고, 땅 위인지 물 속인지 헷갈리고, 꿈과 현실이 뒤섞인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비틀즈의 도움이 컸어요. 향을 맡고 비틀즈를 듣다 보면 이런 풍경을 그리자 하는 게 떠올랐거든요.

향수 출시 이후, 보수 대신으로 잔뜩 받은 향수를 당시의 회사 동료들에게 영업했는데 다들 기꺼이 사주었어요. 고마워요 좋은 사람들.. 카드는 엽서 사이즈로 다시 제작해서 독립서점 몇 곳에 입점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 걸 모두 해볼 수 있는 완벽한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향 샘플만 던져주고 친구는 '어떻게 되고 있냐'는 연락 한 번을 안 했어요. 비틀즈를 너무 좋아해서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마음에 드는 걸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했습니다. 비틀즈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비틀즈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이 작업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욕심). 앞으로도 음악, 사랑, 마음, 향기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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