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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전시의 맛

김환기의 <선, 면, 점> 展

추상미술과의 유희

by 지도그림

1.

김환기 작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술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하면서였다. 당시 전시에는 김환기 작가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종이에 수채 작품으로 A4용지 크기만한 작품이었다. 도슨트 준비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하다보니 김환기 작가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가라고 했다. 그런데 종이에 수채 작품이나 책에 실린 도판들을 아무리 보아도 그의 작품은 나에게 아무런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고작해야 점을 상당히 많이 찍었구나, 정도였다.

그가 왜 중요하고 유명한지 알고 싶어서 평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찾아 읽어 보았다. 백자와 점, 추상적인 형태들 사이에서 무얼 보고 무엇에 감탄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준다면. 한번 그대로 봐보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은 그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리기 위해 관찰하고, 생각하고, 습작하고, 탐색자의 눈으로 묻고 또 관찰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대한 감명 뿐이었다. 내 마음은 그의 작품 앞에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김환기 작가는 내 작가가 아닌가보다, 하고 잊고 있을 즈음, 아는 언니가 그의 전시를 보러가자고 했다. 그는 어렵다는 생각에 일순간 망설였지만 응했다. 그리고 전시를 보러간 오늘, 나는 그의 대형 작품들 앞에 서서 발이 묶인 채, 그저 계속 보고 싶다, 는 생각 뿐이었다. 또 그의 작품은 추상미술을 이해하는 씨앗을 던져주었다.




2.

추상미술은 미술 고유의 언어로 말을 한다. 미술의 언어는 문학의 언어와 다르다. 문학의 언어는 인물, 사건, 배경이 있는 이야기이거나 정서의 표현이다. 추상미술을 문학처럼 봐서는 안된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이지? 하면서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서사적이고 논리적인 눈을 부릅뜨는 순간 추상미술은 기만적인 예술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게 예술이야?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반응이 튀어나온다.

추상미술은 미술 언어로 보아야 한다. 미술의 언어는 점, 선, 면, 색채, 질감이다. 그림에서 논리적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그림의 요소들이 어떻게 작용해서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지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천진난만해, 분노에 가득차있어, 날 멸시하는 것 같아, 광활해, 예민해.

혹자는 이건 작품을 너무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느낌은 감상자와 작품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작품은 고유의 시각 언어로 말을 걸었고, 그 말이 감상자의 마음 한 부분을 긁어 어떤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쌩뚱맞은 개별적 해석으로 파편화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유사한 감상을 할 수 있다. 점선면이 우리의 마음을 비슷한 방향으로 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미술의 언어는 문학의 언어보다 열려 있다. 한계라면 한계고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누군가 분노한다고 해석한 작품을 누구는 열정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누구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미술의 언어가 그럴 뿐이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내려놓고 작품을 보고, 그 작품에서 오는 느낌을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느낀다면 추상미술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미술 고유의 언어로 전달하는 인상과 감각. 김환기의 작품은 나에게 붙잡을 수 없는 인상의 덩어리를 선사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나는 여기서 그 감각을 가능한한 언어화해보고자 한다. 그 감각의 정체를 파헤칠 것이다.

마음에 닿았던 세 작품이 있다.




4.

<10만개의 점, 04-VI-73 #316, 1973년, 코튼에 유채, 263x205cm>


경이. 지금 와서 내 감상을 회고하면 그것은 경이였다. 이 작품은 한 벽 전체를 점유한 채 거대하게 서 있었다. 처음에는 점에 눈길이 갔다. 그 다음에는 공간 분할과 색채에 감탄했다. 이 그림에는 10만개의 점이 찍혀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점은 일렬로 배열되어 있지 않았다. 한 중심에서 퍼져나온 동심원처럼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동심원의 중심은 여럿이었다. 집중과 확산, 여러개의 중심의 존재, 동심원의 일부만 주변에서 비추기. 반대되는 것들이 전체 질서를 잃지 않은 채 엮여 있었다. 입체파의 그림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입체파를 능가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우주를 표현한 것 같았다. 실제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개성있지만 작은 점, 티끌같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같기도 했다. 또 각기 다른 우주를 지닌 존재들의 만남을 그린 것 같기도 했다. 목적없이, 그저 발생하는 존재들의 충돌. 무정형적이어보이면서도 왠지 모를 질서가 느껴지는 분할은 '만남'과 '인연'의 불가해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색채.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쪽지에 이렇게 썼다.

검정색이었다면 슬펐을 것 같고, 노란색이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것 같고, 빨간색이었다면 날 질책하거나 혹은 좀 거만해 보였을 것 같다. 푸른색이라 바다 같고 우주 같고 거대한 힘 같다.

푸른색. 이 푸름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내가 이 푸른색에서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 푸름이 마음에 던지는 파장을 잘 포착해낸 구절이 있다. 짧게 인용해본다.

"비존재처럼 감미롭게 푸르스름한 죽음이다. 왜냐하면 비존재는 무한한 공허며 빈 공간은 푸르다. 그리고 푸른색보다 더 아름답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은 없다. 죽음의 시인 노발리스가 푸른색을 좋아했으며 여행을 하며 오직 푸른색만을 찾았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음의 감미로움은 푸른 색채를 띤다." <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p.322-323

푸름은 무한의 색이다. 바다의 색이고 어둠의 색이고 빈 공간의 색이다. 그것은 우주의 색이기도 하고, 멀리서 조망한 인간 삶의 색이기도 하다. 김환기의 푸름은 인간 존재를 뛰어넘는 세상의 무한함과 그 세상을 이루는 우리들의 내면의 무한함을 이야기한다.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그만의 푸른색이다.

우주의 거대함, 인간의 작음, 관계의 불가해함.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느끼는 경이. 지혜를 엿본 것 같았다.





아침의 메아리 24-VII-65, 1965년, 캔버스에 유채, 177×126.5cm
메아리, 1964년, Oil on canvas, 84 x 169 cm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보였던 두 작품이다. 제목이 비슷한 만큼이나 나에게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같이 묶어서 적어본다. 천진스럽고 순수하다. 누군가 '순수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이 그림들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김환기의 순수 앞에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이것은 내가 처음 본 차원의 순수함이었다. 일단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아니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저항의지를 다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윤동주 시의 순수함과도 달랐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라며 봄의 풍경과 깨끗한 마음과 유음이 노니는 김영랑의 순수함도 아니었다. 이 순수함은 조금 더 거대했다. 학문에 대한 포부와 새 삶에 대한 설렘으로 뭉친 대학교 신입생의 순수함일까? 치매 걸린 노인의 순수함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깊이 있는, 기분이 좋아지는 순수함이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이 작품은 또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멀리서 보면 그냥 푸른 색, 그냥 붉은 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여러 겹의 푸른색, 푸름 속에 도는 분홍빛, 보라빛이 있었다. 점도 아무렇게나 찍은 듯했지만 실제로는 점에 여러 빛깔의 테두리가 있고 여러번 덧칠한 점이었다. 대가만이 칠할 수 있는 색인 것 같았고, 수백번의 습작 끝에야 찍을 수 있는 점 같았다. 이런 세부적인 흔적을 통해 전체의 작품을 만드는 것, 그건 김환기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5.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는 시대에, 우리는 작품을 직접 보러 간다. 책에서, 컴퓨터 화면에서, 상품에서,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그림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러 먼 순례길을 떠나는 것이다.

왜일까?

작품을 직접 보면 작품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의 크기가 있다. 거대한 그림은 거대하게, 작은 그림은 작게 봐야 한다. 크기 자체가 선사하는 느낌이 있다. 인쇄물에서는 그걸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작가의 손길이 있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작가의 흔적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오묘한 색채의 비결도 알 수 있고, 소재의 특성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알 수 있다.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전시는 개별적인 작품의 진열장이 아니다. 전체 전시를 총괄하는 스토리가 있고, 그 스토리 속에 이 작품이 어떻게 위치되었는지를 보면서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김환기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그 동안의 답답함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래서 경험을 예찬하며 끝내려 한다.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소설, 수필, 사진.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직접 경험만이 내 몸과 대상의 만남이자, 가장 강렬한 체험이고, 나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유일한 방식이다.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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