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융 Jan 04. 2018

안녕 한 해

2017년이 끝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지고, 또 가장 슬펐던 한 해가 지나갔다.


1년 가까이를 여행자로 살았다. 연초에는 가족들과 몇 번 여행을 다녀왔다. 부산으로, 그리고 원령공주에 나오는 숲을 쏙 빼닮은 야쿠시마와 빈티지한 매력의 모지코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것들이 많았다. 혼자서 배낭 하나 메고 동남아로 훌쩍 떠나 스쿠터도 처음 타보고, 태국 음식도 요리해먹고, 코끼리 보호소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서핑도 배우고, 야밤에 화산 트랙킹도 하고... 씨엠립의 홈스테이 현지 식구들과는 또 하나의 가족처럼 친해졌다. 이후 바르셀로나와 포르투갈에서 40일 가량을 보내고, 유럽 여행 이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만났다.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버닝맨의 사막에서 마무리하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을 겪었다. 그렇게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실천하며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갔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에 옮겨보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들을 발견했다. 스스로와 조금 더 가까워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일적으로도 다양한 도전을 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도 돈을 버는 실험을 했다. 파트타임 형태로 들어오는 일들도 해보고, 디지털 노마드 친구들과 프로젝트 하나를 함께했다. 여행 다니기 전까진 에어비앤비의 트립 호스트로 외국인 친구들에게 서울의 인디씬을 경험시켜주는 가이드를 했다. 브런치에는 총 45편의 글을 썼고 나만의 사이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것들과 좋은 사람들에게 이끌려 현재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일, 배울 것도 많고 내가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현재는 스페이스 오디티의 브랜드 마케터로 합류해 멋진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고 있다.


1년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만큼 소중하고 멋진 인연들 또한 유난히 많이 생긴 한 해였다. 세상은 참 넓고,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은 이렇게나 다양하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좋은 친구들, 좋은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꼈던 한 해였다. 난 인복이 정말 많다.


돌이켜봐도 멋진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2017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좋은 의미로도, 그리고 가슴 아픈 의미로도.


작년이란 말이 아직 어색하지만... 작년 말 사랑하는 아빠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 생각지도 못한 헤어짐에 세상의 불공평함이 원망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아픔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 동안은 누가 나에게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묻는 게 두려웠다. 그 질문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이건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슬픔이었다. 차갑고 깊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시리고 공허했다. 일상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모든 게 바뀌어 있었다. 힘든 일에는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회복되는 종류의 아픔과는 달랐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슬픔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 공허한 자리를 채운건 기억들이었다. 며칠 동안 매 순간 아빠에 대한 기억들이 나와 함께했다. 함께 보낸 시간들이 생각나면 그게 참 감사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나는 이렇게 슬픈데 그 행복한 기억들 속에는 따뜻함 같은 게 있었다. 아빠의 다정한 모습들이 떠오르면 나는 금세 눈물이 났다.


아빠는 내가 아는 가장 소탈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96년도에 산 차를 20년 넘게 타고 다니고, 아직도 피쳐폰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걷다가 작은 열매 같은 게 보이면 하나씩 따서 말없이 나와 동생 손에 쥐어주곤 했다.


아빠 차를 동생이 같이 타고 가다가, 어떤 오토바이가 사이드미러를 치고 지나간 적이 있다. 부러져 달랑 거리는 사이드미러를 보며 우린 저 오토바이 뭐냐고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이에 대한 우리 아빠의 대답은 이랬다.

"저 사람 손 아프겠다."

너무 아빠스러운 대답이라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그 후로 한동안 아빠는 사이드미러를 테이프로 칭칭 감고 다녔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마치 아주 멋진 영화의 명장면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새삼 느꼈지만 우린 참 가족 여행을 많이 다녔다.


94년-95년도에 우리 가족은 미국에 있었다. 당시 우리는 공기도 좋고 자연도 좋은 곳에 살았다. 우리는 종종 집 앞에 반딧불이들을 구경하러 나갔다. 손을 뻗으면 반딧불이가 잡힐 만큼 초록 불빛이 나를 온통 둘러싸는 곳이었다. 가을이면 집 앞의 밤나무에서 밤을 따곤 했다. 뾰족한 가시를 양쪽 발로 벌리고, 그 자리에서 밤 하나를 까먹었다가 애벌레 반마리가 나와서 기겁했던 기억이 난다. 겨울이면 기러기들이 집 앞 들판에 찾아왔다. 그때는 신발을 조심해야 했다. 온 사방에 길쭉한 기러기 똥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사슴이 발견되고 어쩔 때는 너구리가 발견되는 곳이었다. 이렇게 영화 같은 기억들이 현실이었다.


그때 우리 엄마 아빠는 6살인 동생과 8살인 나를 데리고, 클래식하게 생긴 오래된 차를 타고 미국 대륙 횡단을 했다. 한 번은 동쪽에서 서쪽 -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한 번은 북쪽에서 남쪽 - 캐나다에서 플로리다까지.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엄마랑 아빠는 지도를 펼치고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형광펜으로 긋고 그랬다. 나한테 지도 보는 방법도 가르쳐주고. 내가 지도를 보기 시작하자 나에게 '내비게이터'라는 아주 멋진 별명도 붙여줬다. 내가 그 별명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모험을 좋아하는 건 다 우리 엄마 아빠를 닮아서다. 그때 그 시절에 어린 우리를 데리고, 달랑 지도 하나 들고 대륙횡단을 하다니.


대륙횡단을 하다가 차가 고장 난 적도 있다.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아빠가 웃통을 벗고 열심히 옷을 흔들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으니 어디 연락하지도 못하고, 그저 누군가 우리를 보고 리어카를 불러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차가 모두 수리될 때까지 우린 어쩔 수 없이 플로리다에 며칠 더 머물러야 했고, 나와 내 동생은 개학일을 놓쳐버렸다. 엄마가 이제 와서 얘기해줬는데, 사정을 들은 학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 참 안됐군요. 어쩔 수 없네요... 여정을 즐기세요!Enjoy the journey!"


이런 기억도 있다. 이건 나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꽤 컴컴한 밤에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때 어린 나와 동생은 뒷좌석에서 자고 있고, 운전하던 아빠가 졸린지 엄마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르냐던 엄마는 아빠의 계속되는 요청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 아직도 그게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자는 척하면서 사실은 눈 감고 다 듣고 있었다.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 황금빛 태양~"

엄마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아빠는 잘한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난 그냥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소중한 기억들이라 그런가 어렸을 때인데도 꽤 세세하게 기억난다. 이때 사진들이 가장 많기도 하고... 이밖에도 예쁜 기억들이 참 많다. 5학년 때 아빠가 써줬던 편지에 대한 기억, 중학교 때 아빠의 꿈 얘기를 들었던 기억. 고깃집을 가면 정작 본인은 풀만 먹으면서 우리에게는 고기 사주기를 좋아하던 아빠의 모습 등...


내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 정말 벅차게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아빠의 장례식장에는 수백 명의 분들이 다녀가셨다. 많이 힘들고 슬펐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받았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빠를 존경했다는 말이었다. 수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눈물 흘려주셨고, 아빠가 얼마나 의롭고 따뜻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그렇게 아빠는 멋지게 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사실과 아빠 곁에는 아빠를 아끼고 사랑해준 분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아빠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또 멋진 사람이었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진실했던 사람이었고, 남들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분이셨다. 나에겐 꿈을 꾸는 방법과 세상에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분이었다. 나는 아빠가 늘 자랑스러웠는데, 지금도 자랑스럽다. 정작 본인에게는 많이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쉽지만... 나는 아빠가 우리 아빠여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마음 한켠에선 언제나 아빠가 그립겠지만, 아빠는 여러 가지 예쁜 기억들의 형태로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건 기억들이었다. 힘들 때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용기낼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따뜻한 기억들이었다. 이렇게 보물 같은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진짜 부자란 생각이 들었다.


.


작년 한 해동안 삶의 굴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새삼 또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잠시 다녀갈 뿐이란 사실이다. 삶의 유한함에 대해 이토록 온몸으로 체감한 적이 없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린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먼지만한 작은 순간에 불과하다고 해도 누군가의 마음속엔 어떤 사람이 곧 우주인걸. 우연에 우연이 몇번씩 겹쳐 내가 여기 있게 되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사실인데. 어떻게 이런 인연과 저마다의 여정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소중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멋진 순간들을 보내고 가장 많이 슬프고 힘든 기간을 보냈지만 나는 다행히 내 모습을 지키며 지내고 있다. 현재의 생각들이 이전의 내 생각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인생은 정말 즐기면서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한번뿐인데.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추억들을 쌓고, 주변에 좋은 영향도 줄 수 있다면 베스트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 옆에 있어준 가족, 친구들, 동료들에 대해 커다란 감사함을 느꼈고, 왜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생의 소중함을 느꼈다. 엄마랑 동생이랑 내 주변 사람들이랑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올해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열심히 재미나게 잘 살 거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고.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에 함께 깔깔대면서. 지금까지 그랬듯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과 반짝이는 기억들을 많이 만들면서, 주변에 좋은 영향도 주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더 행복해질 용기를 잃지 않는 한해가 되기를.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네본다. 올해도 잘해보자! 


내 주변 사람들 정말 많이 고맙고 사랑합니다! 모두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