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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융 Mar 15. 2018

천의 얼굴 시즈오카

시즈오카 포토그래퍼의 비밀의 장소들

동생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엄마, 나, 동생 셋이서 여행을 다녀왔다. 멀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었고 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너무 북적북적하지 않은 곳으로, 시원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 가고 싶었다.


막연한 생각으로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중 저렴한 티켓들 사이 내 눈을 사로잡은 사진이 있었다. 우뚝 솟아 있는 후지산을 뒤로 드넓게 펼쳐진 녹차밭. 시즈오카였다.




시즈오카에서도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알아볼수록 시즈오카현은 가보고 싶은 곳이 수두룩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즈반도에서는 3월 초면 만개하는 벚꽃 축제가 진행 중이었고,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낡고 오래된 귀여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너무 넓게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여유 있게 머무르며 소도시든 자연이든 둘러보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가고 싶은 수많은 행선지 중 몇 개는 포기하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벚꽃축제를 과감히 포기했다. '자연을 보자. 맛있는 걸 먹자. 쉬자'는 생각으로 후지산과 이즈반도의 슈젠지를 가기로 했다.


기대감을 안고 떠난 여행은 어떤 선택으로 인해 기대 이상이 되었다. 시즈오카로 가기로 결심하고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에어비앤비로 건축가이자 포토그래퍼인 요시상의 집에 묵은 것이다. 요시상을 만나게 되며 우리의 여행은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요시상이 찍어준 사진. 오른쪽으로는 해가 뜨고 있었고 왼쪽으로는 후지산과 산 능선들이 펼쳐져 있었다. @Yoshihisa Shida


검은색 모자를 쓴 뚱뚱한 삼촌

하루 일찍 와 있던 동생과 시즈오카 역에서 만나 정갈한 소바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우리를 픽업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요시상은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만나기 전 귀여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시에 시즈오카 역 앞에 있는 경찰서 앞으로 와. 검은색 모자를 쓴 뚱뚱한 삼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영어로 "Fat uncle with black hat"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게 본인을 가리키는 말일 줄이야. 하하.


약속된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가자 검은색 모자를 눌러쓴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요시상?"
"응 내가 요시상이야"


포토그래퍼의 비밀장소들

집으로 가기 전 요시상은 잠깐 후지산을 보고 가자고 했다. 여기서부터 아주 멋진 여행의 시작이었다. 요시상이 포토그래퍼이기 때문에 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우리는 양일간 이어서 갈 수 있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언덕은 차 없이는 가기 힘든 곳에 있다. 현지인이어도 이 곳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후지산을 담는 전문 사진가였기 때문에 요시상은 네모난 프레임 속에 후지산을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뷰포인트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요시상이 찍어준 사진. 시내와 후지산이 훤히 보이는 언덕이 있다. 대박!이라고 했지만 이건 시작일뿐이었다.


눈 덮인 후지산은 높고 멋있었다. 멀리서 봐도 이 정도인데 가까이 보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싶었다. 서울보다 남쪽에 있어서 인지 시즈오카는 벌써 봄기운이 만연했다. 언덕에는 유채꽃이 피어 있었고, 벚꽃 나무가 심심치 않게 보였다.

다음날 요시상은 깜짝선물이라며 사진을 뽑아서 건네주었다 ㅠㅠ

후지산과 시즈오카의 전경을 감상한 후에는 요시상 친구네 신사를 잠깐 들렀다. 신사도 조용하고 예뻤지만, 우리의 눈길을 훔친 건 따로 있었다. 신사로 들어가는 길에 오리가족이 앉아 있었다! 여러 마리 앉아 있었는데, 요시상이 "구왁구왁"하니까 오리들이 한 줄로 걸어 나왔다 ㅠㅠㅠ 진짜 너무너무 귀여워서 계속 낄낄 댔다.

요시상을 알아보는 오리들의 행렬. 귀여워 ㅠㅠㅠ

오리들은 "구왁구왁"이 밥 준다는 소리인걸 아는 것 같았다. 요시상이 주머니에서 식빵을 꺼내서 우리에게도 나눠줬다. 우리는 식빵을 조금씩 뜯어서 오리들을 먹여주며 살짝씩 만지고 놀기도 했다.


귀여운 오리들! 그리고 귀여운 달걀 가게

오리들까지 구경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요시상은 달걀이 떨어졌다며 달걀을 사서 가자고 했다. 오리들이랑 실컷 놀고 바로 달걀 가게를 가서 좀 기분이 묘했지만. 달걀 가게가 너무 귀여웠다. ㅎㅎ 가게 안에 들어가면 사물함 안에 달걀들이 들어 있다. 오른편에는 100엔만 내고 가져가라는 야채 바구니가 있었다.


달걀 쇼핑을 마친 후 드디어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다. 사진보다도 컸고, 요시상 아내분이 너무 친절하게 집 안 구석구석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탁자 위에는 바나나와 호두빵, 크래커 등 간식이 가득했고 찻장 속에는 티컵과 머그컵 물 끓이는 기계, 차, 그리고 믹스커피가 있었다. (숙소 사진은 찍지 못했다.)


우리는 이다음날 후지산 일출을 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요시상과 올데이투어를 신청했다. 요시상에게 우리는 후지산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머지 목적지는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다음날 만나기로 한 후 나와 엄마와 동생은 마음 편하게 시즈오카를 돌아다녔다. 쇼핑도 하고, 어묵 바도 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다음 날을 기대하면서...


후지산의 일출


새벽 5시 30분. 집 앞에서 요시 할아부지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5시 반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일찍 일어나는 게 괴로웠을 것 같은데. 눈을 떠야 한다는 괴로움보다는 후지산의 일출이 궁금한 마음이 더 컸다. 에어비앤비에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던 토스트를 발라 먹고, 바나나, 크래커, 주스를 들고 나왔다. (정말 많이도 준비해줬다 ㅠㅠ) 아침에 일어나 후지산 일출을 본건 여행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 되었다.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쳐진 산 틈 사이로 해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고.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며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지는 색깔의 마법과 함께 눈 앞의 광경은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감탄사 외에 별로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말 멋지다', '오길 잘했다'는 말만 하다가 별 다른 말 없이 경치를 즐겼다.


이렇게 아름다웠다

요시상은 차 뒤에서 주섬주섬 캠핑의자와 미니 테이블을 꺼내 우리 앞에 놔주었다. 거기다가 언제 컵도 챙겨 왔는지 믹스커피를 준비해줬다ㅠㅠ 이런 감동스러운 사람... 날씨가 정말 맑았다. 후지산 일출을 안주 삼아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조금 더 이동해서 들어간 곳

요시상이 자주 사진 찍는 장소들. 산 위로 들어가는 길에 요시상이 아는 포토그래퍼 친구들 몇 명과 마주쳤다. 위에서 차 타고 내려오는 분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더 올라가 보자고 말했다. 그 전에는 가려다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실패했는데, 오늘은 왠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올라가는 길엔 아직 눈이 안 녹아 있었다. 돌멩이도 많고 길도 좁아서 엄마가 차에서 내려서 길 앞에 있는 돌멩이들을 옆으로 치워주고 요시상이 천천히 운전하면서 올라갔다. 그 좁디좁은 길을 요시 할아버지는 불 하나 없이 캄캄한 밤에도 올라온 적이 있다고 한다. 후지산과 별을 찍기 위해서.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던 길
이렇게 멋진 산능선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원래 여기서 잘 찍는 사진은 산 능선 사이사이로 구름이 깔려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 날은 날씨가 너무 맑았다. 그래서 좋았지만 :)


그렇게 후지산을 실컷 구경하고 (이후로도 계속 구경했지만) 다음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이미 감동받고 만족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제야 보통 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인걸 보고 놀랐다. ㅎㅎ 이 날 하루가 정말 길었다.



시즈오카를 사랑하는 요시상의 친구들

녹차가 맛있는 시즈오카

다음엔 녹차밭을 일구는 요시상 친구네로 향했다. 다도 체험도 하고! 녹차 잎이 연해서 녹차를 우린 후에는 폰즈 소스와 멸치 등에 섞어서 녹차 잎을 먹었는데 부드럽고 맛있었다. 녹차도 다양한 온도의 물로 미지근한 물부터 더 뜨거운 물까지 여러 번 우려먹었다. 손으로 딴 녹차, 기계로 딴 녹차 차이점도 듣고.


재밌었던 건 저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시즈오카현과 엄청나게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 주인도 사람들이 시즈오카 모양인 거 맞냐고 물어봐서 알았다고 한다. 신기한 우연의 일치. 그리고 우리가 3박 4일간 다른 곳은 안 가고 시즈오카 현에만 있는다는 말에 소녀처럼 밝고 귀여우셨던 녹차밭주인은 도리어 우리에게 너무 고마워하셨다. 시즈오카를 얼마나 좋아하면 우리가 이 곳에 놀러 와서 계속 있는다고 그렇게 좋아하실까. 고마워해 주시는 게 또 고마워서 우리도 우리가 고맙다고 계속 인사를 했다. ㅎㅎ 이 집은 녹차도 좋았지만 화장실도 기억에 남는다. 이 화장실에서는 후지산이 보였다. ㅎㅎ


녹차가 맛있어서 여러 개를 사고, (덕분에 우리 집은 요즘 녹차를 계속 우려 마신다)

요시상은 오래된 집에 사는 자기 친구들의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일본인들은 오래된 걸 정말 잘 보존한다는 걸 또 느꼈다. 전통을 진심으로 소중히 하는 게 느껴진달까...

저 위에 붙어 있는건 100살 넘게 살았다는 상장! 같은거였다
이집은 주인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서 ㅠㅠ 감동이었던 집

앤티크를 모으는 주인도 있었다. 집에는 모빌과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 예를 들면, 조개껍데기를 이용해 고운 천으로 싸고 모양을 내서 물고기로 재탄생시키고, 그 물고기들을 매달아 모빌로 만들고... 가까이서 보면 진짜 예술이었다. 계속 스고이! 를 외쳐드렸다.



멋지다 후지산

조용한 마을에서 녹차도 마시고, 오래된 집도 구경하고 우리는 후지산 근처를 향해 달렸다. 가는 길에 들린 곳은 시즈오카 검색하면 많이 나왔던 이 곳! Satta-toge. 이 날 날씨가 진짜 너무 좋아서 아주 멀리까지 보였다. 바다 색도 예쁘고. 츠노시마대교 갔을 때 생각이 났다.


가는 길에 사쿠라에비(벚꽃새우)가 유명한 미니 항구에 들렸다가 요시상은 후지산 헤리티지 센터라고 새로 생긴 멋진 건축물이 있다며 그곳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여기는 오기 전에 아무리 검색해봐도 보지 못했던 곳인데, 요시상을 통해 알게 되어 기쁘다.


후지산 헤리티지 센터

건축물은 정말 멋졌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이런 건물이 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이 곳에서 보는게 훨씬 더 멋지다. 눈 앞에는 이런 건물이, 오른편에는 후지산이 커다랗게 보인다.


건물은 후지산이 뒤집어져 있는 모양. 바람이 안 불면 물에 건물 모양이 비춰서 후지산 모양이 된다고 한다. 내부도 너무 잘해놨다. 1층부터 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올라가는데, 파노라마로 길게 펼쳐진 영상이 나오며 후지산을 올라가는 느낌이 들게 꾸며놨다. 건축계 최고의 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고 지속 가능한 건축 디자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게루 반의 작품이다.


요시상 따라서 찍은 사진!


맨 위로 올라가면 이렇게 후지산이 보였다. 요시상은 바닥에 후지산이 비치는 걸 이용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따라 찍었더니 멋진 사진이 나왔다. 역시 포토그래퍼는 시선이 다르다.


다 구경하고 배가 고파진 우리는 후지노미야의 유명하다는 야끼소바를 먹으러 출발! 가는 길에 어딜 가나 후지산이 보였다.



'당신의 기억을 보내드립니다'
고마워요 요시상


밥을 먹고 시라이토 폭포와 타누키 호수에도 갔다. 요시상은 우리를 내려주고 천천히 둘러보거나 하이킹을 하고 오라고 하이킹을 하면 다다르는 곳에 미리 가있곤 했다. 그냥 가 있는 게 아니라 늘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

시라이토 폭포와 후지산


내가 타누키 호수에서 찍은 사진들!

타누키 호수 가고 싶었는데 요시상 덕분에 이 곳까지 왔다
엄마랑 내 동생. 행복하자 우리!


자연과 함께한 좋은 여행이었다. 그리고 더 좋은 점은... 엄마와 동생과 함께 보냈던 좋았던 순간을 요시상이 몇 장씩 찍어 여행이 끝난 후 보내준다는 것이다.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할 때만 해도 그런 게 포함되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여행이 끝나고 나와 페북 친구가 된 요시상은 사진을 여러 장 보내주었다. '너의 기억(Your memory)'란 짧은 문구와 함께.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행을 담은 영상까지 만들어주셨다 ㅠㅠ 맨 뒤 크레딧이 진짜 제일 귀여운 포인트.



내가 기분 좋게 간직할만한 순간을 누군가 포착해서 선물로 받은 기분이다. 시즈오카에 가는 친구들 있으면 무조건 이 곳을 추천해야지. 에어비앤비로 좋았던 경험이 너무 많지만, 역대급 호스트였다.


마지막에 요시 할아버지랑 헤어질 땐 우리 모두가 아쉬움이 가득했다. 정말 좋은 여행이었다고 서로를 꼬옥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요시상! 덕분에 다시 가기 전까지 시즈오카는 더욱 멋지고 따뜻한 곳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귀엽고 따뜻한 요시상 <3 감사해요



번외 편 - 슈젠지

푹 쉬었던 료칸

창밖엔 대나무숲. 이렇게 밖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참 좋았지


관광 책자나 검색하면 많이 나오던 슈젠지의 모습들 보다도. 봄을 본 게 좋았다.

특히 매화나무와 파란 하늘.


나는 벚꽃보다 매화가 좋더라


특별히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동네를 걸어다녔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바닐라+와사비 아이스크림. 내 스타일이야! 대나무 숲 가운데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즐겁고 따뜻한,

우리에게 필요했던 여행이었다.

시즈오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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