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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융 Jul 06. 2017

여행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여행을 다니며 꼭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바르셀로나에서 18일을 보내고 포르토로 왔다. 알록달록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도루 강 쪽으로 나오면 물가에 반짝이는 햇빛과 포르토의 붉은 지붕들이 보였다. 유럽에서 가장 떠오르는 여행지로 점점 더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포르토는 예전 모습 그대로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있다. 이 곳에 사는 로컬들이 급증하는 관광객 수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꽤 고집스럽게 예전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 것 같지만 - 아직 이 곳에는 스타벅스도 없다. 강 건너편 가이아에 하나 있고, 일요일이면 관광객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워킹투어를 할 때 로컬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온다고 해서 우리가 살던 방식을 바꿀 거라고 기대하진 마."


나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말이 좋았다. 상대방에게 모든 걸 맞춰준다고 해서 그게 꼭 가장 좋은 건 아니니까. 설령 조금 불편할지라도 나 때문에 행동을 바꾸는 누군가의 모습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거렸던 도루 강과 마을 전경.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작은 도시일 줄 알았는데 나름 볼 것도 많고 조금 더 천천히 포르토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5일을 머무르려던 계획을 수정해 일주일로 연장시켰다. 현재 살고 있는 에어비앤비 집을 체크아웃하는 날 강 건너편 가이아의 다른 에어비앤비를 찾아 2박을 더 예약했다. (포르토의 강 아래는 포르토가 아니라 가이아다. 1,000년이 넘게 강을 건너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도시로 나뉘었다.) 



방 안을 음악으로 채우면 또 다른 여행이 되고


생각했던 일정에서 이틀이 더 늘어나면서 마음은 한 층 더 여유로워졌다. 일정을 연장시킨 날 오후 나와 사과는 집으로 돌아와 빈둥거렸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듣고 싶었던 노래를 틀어놓고 각자의 방식으로 늘어져 있었다. 


나는 이렇게 소파에 누워 노래를 따라 부르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날 나와 사과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이 말이다. 


"아 너무 좋다"


포르토를 처음 돌아다닐 때도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예뻐", "진짜 좋다"란 말을 남발했지만, 집 안에 있을 때도 '좋다'는 말이 자꾸만 나왔다. 이런 말이 계속 나오게 된 데는 노래도 한 몫했다. 파란 하늘, 푸른 강, 붉은 지붕, 갈매기와 고양이, 여유로운 사람들이 가득하고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포르토에서 나는 예전 노래들이 듣고 싶었다. 우리나라 옛날 가요들. 장필순의 노래가 가장 먼저 듣고 싶었다. 그다음엔 미성의 윤종신이 부르는 '텅 빈 거리에서'가 듣고 싶었고,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가 듣고 싶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단숨에 듣고 싶은 노래들이 연달아 떠올랐고 아예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버렸다. 

두 시간동안 노래를 틀어놓고 빈둥댔다

동남아에서 호스텔에서 묵거나 홈스테이를 할 때는 이런 재미는 없었는데. 에어비앤비 집 전체를 빌려 공간을 음악으로 채우니 집 안도 완벽한 여행지가 되었다. 창 밖으로는 포르토의 일상이 보이고 집 안에는 오래됐지만 독특한 가구들, 따스함이 느껴지는 소품들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집 안에서 각자 빈둥대고 있는 나와 사과


여행지라고 꼭 밖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빈둥대고 있을 때 나는 묘한 행복을 느낀다. 방 안에 누워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음악과 함께 공간을 둥둥 떠다닌다. 


새롭고 대단한 것을 처음 볼 때의 감동과 놀라움만큼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도 좋아한다. 여행 중 이렇게 쉬는 시간은 낯선 곳에서 이것저것 보고 느끼느라 바빴던 우리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간을 통해 비로소 이전에 나에게 자극을 주었던 것들이 내 것으로 흡수되는 느낌이다. 아, 물론. 혼자가 아니라 나만큼 이런 시간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해서 더 즐거웠다.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고 이 기분 좋은 순간에 공감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순간의 소소한 행복을 배가시킨다.


유럽으로 오기 전 약 일주일간 혼자 제주도를 갔을 때도, 동남아에서 본 바닷가보다도 예쁘다고 느꼈던 월정리 해변을 봤을 때만큼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제주도에서 묵었던 돌집

제주도를 둘러보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노래를 틀어놓고 글을 썼다. 그럼 그냥 기분이 좋았다.



낭만이 일상인 발렌시아의 광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꼭 집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꼭 여행지에서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저번 달에 스페인에서 혼자 발렌시아로 3일간 여행을 다녀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집 앞의 광장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던 시간이다. 해 질 무렵 Plaza de la verge의 분수대에서 나는 2-3시간가량을 앉아있었다. 카메라도 들고 나오지 않은 채 핸드폰과 지갑만 간단히 챙겨 나와 분수대에 앉은 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건 꽤 묘한 기분이었다.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장소에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몇 시간 동안 사람을 구경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 나만큼 오래 머무르는 행인은 없어 보였다. 광장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도 내가 앉아 있는 시간 동안 세 번이나 바뀌었다. 


내가 이 시간이 좋았던 이유는, 집 앞이라 매일 같이 지나다녔던 광장인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더니 안보이던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나는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글로 기록해보기 시작했다. 글로 기록하기 시작하니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소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거대한 남자 석상이 가운데에 앉아있는 분수대가 있다. 광장의 왼편에 위치한 이 분수대는 밤이면 불이 켜지고, 분수에서 나오는 물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광장을 향해 이 분수대를 등지고 앉으면 적당히 넓은 광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은 검고 붉은 색깔이 뒤엉킨 대리석으로 깔려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앞에는 길거리 연주자가 클라리넷으로 웅장한 느낌의 오페라곡들을 부르고 있었다. 네순 도르마, 넬라판타지 등 들으면 누구나 아는 오페라곡들이다. 분수의 물소리와 클라리넷 소리가 섞여 광장에 울려 퍼졌고 광장을 둘러싼 오래된 교회와 핑크색 바실리카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 곳에서는 분수 소리가 크게 들렸지. 물소리가 음악 소리랑 섞여서 더 낭만적이었는데 사진으로만 봤다면 잊고 있을 뻔했다. 


분수대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분수대는 '포토스팟'이었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생각보다 정말 재미있었다. 혼자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 그런지 글을 쓰다 종종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분수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줘야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하얀 옷을 맞춰 입은 중년의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분수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이 커플을 보며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고개를 돌리니 둘이 키스를 하고 있었다. 키스를 하고 안아주더니 어느 순간 일어나 클라리넷의 오페라곡에 맞춰 함께 천천히 춤을 추었다. 남자는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있었고, 여자는 머리에 선글라스를 쓰고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인가. 스페인 사람들인가. 두 사람의 몸짓에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곡이 멈추자 천천히 걸음을 옮겨 클라리넷 연주자에게 팁을 주고 사라졌다. 멋있는 커플이었다. 이런 장면이 보이는 일상이라니. 사랑이 넘실대던 커플은 광장이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게끔 해주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걸 전혀 몰랐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둘러보니 급하게 사진찍고 지나칠 때는 몰랐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앉아 있었던 광장의 분수

해가 지고 노란 불이 켜지니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하늘이 까매지니 파이어댄서가 나타나 춤을 췄다. 앉아 있는 내내 건물의 색깔도 하늘의 색깔도 내가 보이는 장면도 계속 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찬양은 이쯤에서 마쳐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종종 여행을 할 때, 여행을 마친 후에도 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끼어넣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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