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는 다름이 자연스러웠던 친구들
대학교 때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나는 경영대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미술과 심리학을 부전공했다.
마케팅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는 것이 많아서 한 가지를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했고, 노는 것도 좋아했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의 나에게 하나의 진로를 정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뭘 가장 좋아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케팅'이란걸 알게 됐다.
가장 처음 '마케팅'이란걸 알게 됐을 때 내가 들었던 설명은 꽤나 멋졌다. 마케터는 각기 다른 악기로 멋진 화음을 만드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비슷하다고 했다. 연주자만큼 깊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에 대해 조금 조금씩 알고 있어야 하며 그들을 조율해 하모니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마케팅이 뭔지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많은 것들을 좋아하는 게 장점이 될 수 있는 일 같았다.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일 같았다. 그때는 그거면 됐다 싶었다. 부전공은 그냥 재미있을 것 같고 배워보고 싶은 과목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경영대 학생으로선 흔하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마케팅 전공에 미술과 심리학을 부전공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예상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마케팅'에 대해 경영대 밖에서 배운 게 더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들이 인문학 인문학 하나 싶은 생각도 했었다.
경영대의 수업들도 물론 좋았다. 대학시절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수업을 꼽으라면 제일 재미없을 줄 알았던 기업윤리다. 기업윤리라기보단 철학 수업에 가까웠다. 교수님이 매일같이 던지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서로의 답변을 놓고 반박하고 공감하고 토론하면서, 내가 믿는 것에 있어선 타협하면 안 되겠단 생각도 강해지고, '나'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싶은지를 조금씩 깨닫게 됐다.
마케팅 관련 수업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일할 때 물론 도움이 되었다. 4P, STP, 잘된 마케팅 사례와 같은 기본기를 다지고,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내고 각종 제안서를 만들고 발표하며 뭐가 뭔지 알게 되었다. 팀워크와 리더십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기 이상의 그 어떤 것은 채워지지 않았다.
3학년 때쯤인가.
미술 부전공의 일환으로 '디지털 포토그래피'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는 정말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경영대 학생은 나 하나였다. 나머지는 패션 에디팅, 뉴미디어, 히스토리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 친구들은 모두 전공도 다르고 패션도 개성 넘쳤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개인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의 홈페이지는 개인 프로젝트로 가득했다. 그게 직접 그린 그림이든, 공연 사진이든, 글이든, 자신이 만든 다양한 것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기 PR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 수업을 통해 사진보다도 많은 것을 얻었다. 재미있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이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 매일매일이 배움의 연속이었다.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워낙 이곳저곳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라 요즘엔 뭐가 대세인지, 페이스북보다 트위터가 더 급속도로 뜨고 있다든지(그땐 그랬다), 데이빗 보위가 곧 공연하러 온다든지 하는 소식들을 들었다. 내 주변 경영대 친구들보다도 이런 소식에 있어서는 훨씬 더 빨랐다.
하루는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낄낄거리며 방금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들어오는 길이라며 자랑을 했다. 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zine(특정 주제를 가진 미니 잡지)이란걸 툭하면 만드는 애들이었는데, 그날도 이 남자 아이가 만든 zine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 친구는 '영혼을 타락시키는 20가지 방법'이란 zine을 제작했다. 한 15장 정도로 이루어진 작은 책이었는데 책에는 자살토끼처럼 영혼을 타락시키는 다양한 방법이 이 친구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뭐라고 할 정도로 과하거나 이상한 건 없었다.)
이 친구는 뉴욕 곳곳에 있는 책방의 '어린이책' 코너에 이 책을 꼽아 놓고 왔다고 했다. 친구의 목적은 분명했다. 한 꼬맹이가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이 책을 관심 있게 보게 되면 영혼을 타락시키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이 책을 보고 어떤 꼬맹이가 울음을 터트리면, 부모가 책을 보고 충격 먹거나 그 책방을 욕하게 될 것이라는 거다. 친구는 그럼 목표 달성이라며 또 한번 깔깔거렸다.
얘기를 듣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지만 또 한편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참 신기했다. 거의 무슨 행위예술스러운 행동을 하는 걸 보면서 '정말 남들과 다르구나'를 느꼈다. 옆에서 보기에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남들에게 또는 환경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라면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게 욕할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해보는 것보다 대단한 행동이 아닌가.
이 수업시간의 에피소드는 많다. '자화상 찍기'라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도, 자신의 모습을 담겠다며 길거리에 침대를 설치하고 거기서 사진을 찍는 친구도 있었고. 한마디로 괴짜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경영대 마케팅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했던 중요한 무언가가 이곳엔 있었다.
개성 넘치는 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나 자신이 가장 평범해 보였다.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고 내가 디자인하는 거다'라는 생각을 이 친구들을 보면서 더 느꼈던 것 같다. 이 수업이 끝나기 전에 나 역시도 내 개인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내가 찍은 사진들로 나만의 명함을 만들기도 하고. 친구들로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배워서 온라인에 포트폴리오를 쌓아두고, 잘 한 것들은 예쁘게 뽑아서 큰 파일에 정리해서 인터뷰마다 들고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할 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포트폴리오다.
면접 때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면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디자이너도 아닌데 포트폴리오를 꺼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포트폴리오는 최단시간에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경영대 밖에서 친구들로부터 배운 그 무언가가 내가 취직을 할 때도, 마케팅을 할 때도 플러스 요인이 돼주었다.
마케팅으로 일을 시작한 지 5-6년이 되어 간다. 아직도 갈길이 멀지만,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은 결국 소통이다. 지속적인 소통이 잘 이루어져서 서로 간의 관계가 쌓이면 그게 브랜딩이 되는 거고. 데이터도 결국 소통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것 같다. 내 얘기를 잘 들어줄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마케팅이라고 하지 않나. 영화 '인턴'의 앤 해서웨이가 고객센터와 배송 박스의 작은 포장지까지 챙기는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차이를 만든다. 요즘 같은 시대엔 특히 그런 것 같다. 모바일과 SNS를 통해 거의 개개인 한 명 한 명이 매체화되고 있는 시점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이야기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알면 알수록 참 어려운 건 애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 이게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과대 포장하는 마케팅은 하고 싶지 않은데 욕심 내면 억지스럽게 될 때가 있다.
새로운 스타트업으로 온지 열흘째, 나는 즐겁게 잘 지내고 있다. 걱정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감이 더 크다. 아직 서비스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마케팅을 할까 고민도 되지만 백지상태기 때문에 더 즐겁다.
사진반에서 만났던 반짝이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경쟁사 의식하지 않고 가장 우리 다운 방식으로 일하고 소통하는 것. 어렵겠지만 재밌을 것 같다. 가장 '우리 다움'은 곧 '남들과 다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 같은 회사에겐 그게 결국엔 가장 큰 경쟁력이자 가장 세련된 마케팅 방법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