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bra윤희 Sep 13. 2024

죽음을 앞둔 엄마의 편지

이별에 관한 이야기 1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유품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가 생전에 욕심껏 모아두었던 보석함의 보석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는 지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갈 때, 가족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려 함께 모인 자리, 오랜만에 친구들과 식사가 있는 자리에 나갈 때, 반지나 목걸이로 한 껏 치장하기를 좋아하셨다.


 할머니의 손에서, 목에서 그렇게 반짝이던 보석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보석함에 들어있는 그 보석들이 왜 모두 빛을 잃은 것 같지? 당장 버려도 아무도 안 가져갈 것 같이, 뿌연 돌이 돼버린 듯한 그 보석들, 보석들의 빛은 할머니와 함께 사라진 것만 같았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후, 빛을 잃지 않고 색채를 오래 지닐 수 있는 그 사람의 물건은 없을까?      




만약 한 달 후에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는 책상 위 책들, 과하게 사 모은 펜과 포스트잇, 새벽 글쓰기에 흐른 눈물과 콧물을 닦은 휴지, 아이와 남편 옷가지에 섞여 널려있는 내 속옷, 욕심껏 맞췄던 두 개의 안경, 어떤 치마보다도 사랑했던 치마인 ‘앞치마’ 여러 장, 여름이나 겨울이나, 집 안에서 신고 다니는, 다 해진 면 실내화 그런 것들이 한 달 후에는 이 집에서 사라져야 하겠지. 약간의 분홍색이 들어있거나 꽃무늬가 추가된 물건들도 아마 한 달 후에 서서히 이 집에서 사라질 것이다. 남자 셋이 살아가는 집은 지금보다 어둡고 조용할 것 같다.     

 

 내 물건들은 정리하다가, 혹은 내 노트북의 파일들을 열어보다가 가족들 중 누군가가 내가 쓴 편지를 발견한다면, 그 편지는 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을까? 슬프지만 조금은 아름다운 색채로 기억되지 않을까? 만약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발견되리라 기도하며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싶다.

          

서준, 현준에게  

   

아들들아 안녕?


 정말 오랜만에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다. 매일 글을 쓰면서도 너희에게 편지 쓸 생각은 따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을 전하지도 않고선 전해졌을 거라고, 대충은 알아줄 거라고 그렇게 짐작하며 오랜 시간을 살아왔네. 전하지 않으면 흐려질 것 같아서 마지막 편지를 쓰려해.      


 누운 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양평 할아버지 댁에서 우리 같이 밤 줍던 때가 떠오른다. 초등학생이었던 너희와 40대 초반의 나는, 검은 봉지랑 집게 챙기고 장화 신고, 매년 9월 중순이 되면 마당에서 밤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보초 서고 그랬잖아. 할아버지 집 옆으로 쭉 나 있는 밤나무길을 따라 걸으며, 겁 많은 서준이는 긴 집게로 큰 소리를 만들며 혹시라도 있을 뱀에게 나오지 말라며 경고장을 날리곤 했었지. 엄마는 뒤에서, 너희가 넘어져 밤 가시에 찔릴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반짝이는 밤을 찾고 있었어.


 가을 모기가 필사적으로 앵앵거리는 검붉은 갈색 수풀 속엔, 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밤들이 숨어있었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살찐다고 많이 먹어댈 밤도 아니었지만, 숨은 밤을 주울 때 우린 산삼이라도 발견한 양 큰소리로 “여깄 다”를 외치곤 했어. 현준이는 “엄마, 큰소리로 외치면 엉아가 듣잖아. 나한테만 알려줘.” 하며 귓속말을 했고, 서준이는 혼자 앞서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며 현준이의 봉지를 흘끗거리곤 했지. 한바탕 줍고 올라와서는 서로 누구 봉지가 더 무거운지 어느 봉지에 있는 밤이 더 큰지 비교하며 웃는 순간도 모두 기억난다. 함께하는 그 순간들이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오래 빛날 것이란 걸, 우린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밤길에서 걷던 때처럼 너희는 신나게 새로운 삶을 찾아가고 엄마는 뒤에서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응원했어. 평생을 그래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너희들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마음만은 항상 행복했어. 숨겨진 밤을 찾듯 인생의 보석을 발견하는 너희를 오래도록 기꺼이 지켜보았지. 너희가 찾는 것이 거기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도 꾹 참고 말하지 않을 때도 많았어. 가끔 뒤돌아봐 주길 바라면서.   

   

 엄마의 마음속에 너희는 다 자라지 않은 아이처럼 남아있어. 빡빡한 태엽을 최대한 돌려 지금의 시간에 맞춰 놓지만, 마지막에 멈춰서는 곳은 항상 밤나무길에서 집게를 들던 그 작은 모습, 그 익살스러운 표정이야. 엄마 마음속의 오르골은 늘 뒤로만 가는 것 같네. 잊힐까 두려운 것 마냥.     


 언젠가 현준이가 거실에서 나를 부르며 “엄마 이것 좀 봐” 했던 날이 떠오른다. 하늘에는 처음 보는 자주색 노을이 무심하게 걸려있었어. 아까와 똑같은 세상이란 걸 알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질 정도였지.


 “엄마 저 노을 너무 예쁘다. 엄마처럼. 다음에 어디 가서 저런 노을이 또 보이면 엄마 생각날 것 같아. 이런 게 추억이란 거야?”


 추억 마니아 현준이의 그 말에 엄마는 눈물이 차올라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정말 너희들이 그래 줬으면 좋겠다.. 기도하며 노을을 바라봤어. 삶을 살아가며 해가 지고 밤으로 가는 중간, 잠깐 피어나는 노을의 향기를 맡을 때, 어느 날 문득 엄마와의 추억을 꺼내주면 좋겠어. 엄만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너희에게 한동안 하지 못한 말 같은데... 전해지면 좋겠다. 사랑해~~ 너무 많이.    

 

 엄마가

이전 03화 라일락, 우정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