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뮤턴트였다

결국 출판계에서도 뮤턴트로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뮤턴트였다."



30대 초반에 처음으로 흰머리를 발견했다. 비록 한 가닥 새치에 불과했는데 처음 본 내 흰머리에 몇 분 동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40대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흰머리가 생기는 체질인 걸 알았다. 처음 몇 년은 염색을 했지만, 어느 순간 꼬박꼬박 염색하는 그 자체가 번거롭고 두피 건강에도 좋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싶어서 더는 염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군데군데 배어있는 흰머리 군단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25년 전 스물다섯 살 생일을 맞은 친구들끼리 “이제 드디어 꺾인 오십 살이 되었어!”라며 12월 26일에는 의미없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서로를 놀리곤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스물다섯 살은 정말 청춘이다 못해서 파릇함 그 자체였다. 이젠 꺾인 오십 살이 아니라, 정확히 반백 년을 살아 온 중년이 되었다.

50세는 지천명(知天命)으로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고 한다. 40세에 흔들림 없는 불혹(不惑)을 입에서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나 지난 것이다. 나는 하늘의 뜻을 알면서 살고 있을까? 남들은 슬슬 은퇴를 떠올릴만한 나이에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것도 이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분야. 출판업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무리 중에 어색하게 껴있는 뮤턴트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첫 전공인 교육학을 공부할 때도, 두 번째 전공인 건축학을 공부할 때도 그랬다. 문과에서 과감하게 이과로, 그것도 공대로 넘어간 것도 용감한데 그 이외의 인생 대부분의 선택에 있어서 인싸보다는 자발적 아싸에 가까웠던 것 같다. 주류(主流, 酒類아님주의)보다는 언저리에서 맹렬하게 자기 삶을 영위하는 쪽이었다.

좋게 말하면 융합형 인간이요, 제너럴리스트지만 젊은 시절 나에게 이런 선택의 연속은 잠재적 콤플렉스였다. 친구들은 한 분야에서 진득하게 공부하고 결국 그 직업에 뿌리를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내 성향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한때는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내가 건축가에서 작가를 거쳐 출판사 대표로 넘어온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다. 궁금하면 내가 쓴 책 두 권에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책 홍보는 절대 아니지만, 궁금해할까 봐 제목만 적어 놓겠다. ⟪어쩌다 마주친 발레⟫, ⟪바른 발레 생활⟫) 어쨌든 출판계라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고 보니 이 분야야말로 ‘자신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일을 하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신의 결, 자신의 색을 담은 것을 고스란히 책으로 만들게 된다.

결코 내가 쓰는 출판 이야기가 정답은 아니다. 나야말로 건축가 출신으로 작가를 살짝 찍고, 1인 출판사를 시작한 초보출판인이고 책을 만들기까지 고군분투 이야기를 하나씩 정리해서 글로 쓰는 거다. 지금 머릿속에 베테랑 편집인의 찐템 노하우를 기대했다면 빨리 기대치를 한껏 내리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 창을 당장 닫으라는 것은 아니다. 베테랑 편집인의 멋진 노하우보다 여기의 서투른 고생 만땅 고군분투기가 훨씬 재미있을 거라 확신한다. (원래 남이 고생하고 실수한 이야기는 은근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왜일까?)


책을 만들려면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고민해야한다.



Q | 그렇다면 나는 왜 출판사를 시작한 것일까?

A | 귀가 얇아서다. -_-


브런치에서 작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첫 번째 책을 정식 출간한 나에게 심심찮은 출간제안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출판사에서 색다른 콘텐츠 방식, 예를 들면 전자책이나 또 다른 플랫폼 방식의 제안도 들어왔지만,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중견 출판사의 편집자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출간제안서’ … 얼마나 설레고 달콤한 단어인가? 출판사 몇 군데와 미팅을 했고, 병아리 작가가 보기에도 영 아니다 싶은 출판사의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고, 최종 두 군데 출판사와 일을 진행하게 됐다. 편집자와 출간 제안 회의를 거쳐 출판권 설정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드디어 두 번째 책을 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계약서 도장을 찍기 며칠을 앞두고 담당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작가님, 너무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계약을 못할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을 너무 내고 싶은데, 위 데스크 마지막 컨펌에서 밀렸습니다. 아무래도 발레 분야의 책으로는 큰 수익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회사에서 승인을 안 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작가님이 어떻게든 이 책을 꼭 출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연이어 연락이 왔던 다른 큰 출판사에서는 청소년 예술 분야 시리즈로 이 책을 넣고 싶어 했는데 회사가 자체적으로 규모를 줄이면서 아예 시리즈를 기획했던 팀이 해체되는 일을 겪고 말았다. 아무리 계약서에 작가가 ‘갑’의 자리라고는 해도(막상 출간 계약서 쓸 때 처녀 작가들은 저자가 갑이라는 점에 매우 놀란다. ‘내가 갑이라고?’) 회사가 긴축 재정을 한다는데 내가 뭐라 하겠는가. 심지어 담당 편집자는 이 기간에 아예 다른 장르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이 과정이 장장 10개월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쯤 되면 상당히 맥이 빠져서 과연 작가로서 나의 책을 계속 낼 수 있을지에 의구심이 생긴다. 이때 이 과정을 쭉 지켜보던 나의 평생 절친이자 우리 집 동반자가 진지하게 제안을 했다.

“책 내는 게 어렵다면 당신이 직접 출판사를 해보는 게 어때?”

“뭐…? 출판사? 내가?”

“어차피 좋은 글, 좋은 내용을 제대로 아카이빙한다는 생각이라면 욕심을 내려놓고 시작해봐.”



이 마지막 말을 듣고 약 한 달 동안 고민했다.

(사실은 내가 믿는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에 귀가 상당히 얇은 편이다. 던지면 덥썩 문다.)

한다. 안 한다. 해야겠다. 아니 그래도 출판사는 과하다. 못 해 먹겠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고민을 한다는 건 이미 내 마음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는 방증 아닐까. 고민과 걱정의 실타래를 줄줄 풀어내면서 결국 나는 한달이 지나고 나서야 출판사 신고필증을 내게 됐다. 신기하게도 출판사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다. 심지어 집 주소로 출판사를 낼 수도 있다. 당연히 처음에는 사무실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 주소로 신고를 했다. 출판사에 관한 A to Z 관련 책을 찾아보니 이 허가제로 인해 1인 출판사는 폭발 상태이고, 심지어 전체 등록한 출판사 중에서 1종 이상 책을 낸 출판사는 6%에 불과하고 등록만 하고 1종도 출간하지 않은 무실적 출판사가 94%를 차지한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 자료 근거) 나는 출판사 신고필증을 받으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내 출판사는 반드시 저 6% 안에 들어간다.’



세무서에, 구청에, 발품을 팔아서 결국 두 장의 서류가 내 손에 쥐어졌다.

사업자 등록증, 출판사 신고필증.

두 장의 종이를 액자에 넣고 책꽂이 한쪽에 올려놨다. 기쁨보다는 덜컥 겁이 난다.

‘자… 이제 어떻게 책을 만들어야 하나?’

책을 만들기 위해서 책을 통해 글로 배운 게 전부인데 눈앞이 캄캄해진다. 결국 그 순간 나는 단단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세계에 뛰어든 또 하나의 뮤턴트에 불과했다.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연재를 시작했으니 결국 나의 출판사는 지금까지 망해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중년의 뮤턴트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과연 쓸만한 능력을 탑재하고 있었던가.

그건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