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워지거나 뻔뻔해지거나

웰컴 투 더 정글



"두꺼워지거나 뻔뻔해지거나"


대학에서는 치열하게 설계 공부를 했다. 관련 서적도 많이 읽고, 손 도면도 그렸고, 당시 건축 분야에 처음 도입된 오토 캐드로 도면 작업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일을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밤새 그린 도면을 들고 막상 현장에 나가면 언제나 변수가 생겼다. 건축 현장에서는 시간이 곧 돈이라서 공정이 순조롭도록 주어진 작업 시간을 일초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작업 중 건물 준공 도면과는 다른 부분이 생기거나, 클라이언트의 갑작스레 요구 변경으로 현장에서 도면을 다시 그리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했다. 공정은 항상 시간과 정해진 예산과의 싸움이었다.

건축 현장은 머릿속의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사람의 아이디어가 사람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다. 그것도 한 사람의 손이 아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실재의 건물이 완성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현장 기사는 실수 남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공정의 소장님한테 그런 실수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항상 다 아는 척, 센 척으로 일관해서 현장 인부들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렇게 허울만 있던 젊은 현장 기사에게 오랜 경력의 나이 지긋하신 목공사 소장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윤 실장! 더운데 커피 한 잔 사줄게. 마시러 갑시다!”

지금처럼 커피 전문점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고, 현장 근처는 번화가가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지하 다방’에 들어갔다. 얼음이 가득한 달달한 다방 냉커피를 마주하고 소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 힘들지? 대학에서 도면만 그리다가 이렇게 큰 현장 치려면 힘들겠어.”

“휴… 제가 이론만 알아서 많이 부족하죠? 잘하고 싶은데 현장에서 변수가 생기면 정신이 없네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마. 여기 현장 인부들은 평생 이것만 해온 사람들이야. 오히려 잘하려 하지 말고 하루에 나와서 한 가지씩만 배운다 생각해. 여긴 분명 학교와는 또 다른 공부를 하는 곳이니까, 현장 일 모르는 게 당연하고, 모르는 건 언제든 물어봐. 모르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우린 모두 윤 실장이 이 프로젝트를 잘 해내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야.”

부족한 사람에게 ‘너는 무엇이 부족해’ 보다 부족한 것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도록 조언해 준 그분은 내 인생, 그 순간 나의 큰 스승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지나온 과정을 무시할 수 없다. 건축 현장에서 사회생활, 인생을 배운 나는 여전히 ‘책을 만든다’라는 표현보다 ‘책을 짓는다’고 표현하곤 한다. 출판 분야는 왕초보였지만 건축 베이스로 살아온 나에게 모든 기준점은 건축이었다. 책은 짓는 것이고, 건축 공정표와 비슷한 출간 기획안으로 사고했다. 그게 편했다. 다만 출판에서 새로운 협업자를 만날 때 먼저 내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플로어웍스 대표 윤지영입니다. 저희 출판사가 발레책을 출간하려는데, 제가 출판 일은 처음입니다.”

나와 협업하려던 모든 사람은 이 말에 약간 당황했다. 북디자이너, 교열교정 에디터, 인쇄 담당 에이전시, 인쇄소, 서점 마케터, 오프라인 서점 MD까지… ‘외관상으로는 출판계에서 짬밥 좀 먹어본 연령인데 초보라고? 직함은 대표인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상대가 이런 마음속 상태 메시지를 말풍선으로 시뮬레이션 하는 표정을 지으면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사실 저는 책을 딱 한번 출간한 경험만 있는 작가입니다. 정작 책 만드는 건 처음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씩 열심히 배우면서 최선을 다해서 책을 대하겠습니다. 계속 배울 테니 많이 가르쳐주세요.”

마치 90년대 조폭 영화 팔뚝에 새긴 문신 단골 멘트 ‘차카게 살자’ 수준의 진솔한(?) 고백은 협업사 담당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직함만 대표였지 나는 모든 분야를 혼자 아울러야 했다. 수직적인 갑을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파트너 마인드로 업무를 대하니 힘들지 않았다. 배워도 계속 모르면 게으름뱅이지만, 어떤 일을 처음 배울 때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25년 전 현장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처음 출판 일에 도전한다면 낯짝을 좀 두껍게 하고, 정정당당한 뻔뻔함 정도는 준비해두는 게 좋다.



"과감한 올라운더로 변신!"

나 같은 1인 출판사 대표는 과감히 올라운더가 돼야 한다. 편집, 제작, 디자인, 마케팅, 영업, 행정, 정산 등 모든 일이 내 손을 거친다. 물론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는 없다. 출판계는 처음이었지만 이런 식의 협업 과정을 그동안 일 해왔던 분야에 대입해봤다. 건축 과정에서 회사는 설계부터 현장 실제 시공이 이루어지고 감리를 하고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그렇다면 책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공정의 협력 업체와 비슷하게 보면 될 것 같았다. 설비, 목공사, 철물, 전기, 도장, 조명, 가구 등 각 공정 대신 교열 교정, 북디자인, 인쇄 , 후가공, 배본, 입점, 광고, 전시, 판매 등을 떠올리면서 하나씩 도장깨기를 했다. 이게 반드시 모든 초보출판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가장 익숙한 방식이기에 사용했지만, 각자 자신이 편하고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면 된다.

출판계 경험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출판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좋은 작가를 섭외하는 것도, 좋은 원고를 받는 것도, 그 원고로 좋은 책을 만드는 것도, 잘 팔리는 책이 되게 하는 과정까지. 그 무엇 하나 쉬운 것은 없다.



광화문 교보문고 전체 서가 중 지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 섹션

|웰컴 투 더 정글|

출판계에 과감한 출사표(다른 이들은 별로 관심도 없는)를 던지고 평소에 즐겨 가던 교보문고를 방문했다. 독자이던 시절에는 서점 입구에서부터 마냥 신나서 힘차게 들어갔고, 첫 책을 내고 작가였던 시절에는 평대에 누워있는 내 책에 다가갈 때 너무 떨려서 노래 <그녀를 만나기 100미터 전>을 마음속에 시전하고 다가갔다. 그러다가 출판사 대표(아직 1종 책도 내지 못한 무늬만 대표)가 돼서 서점을 들어가려는데 순간 너무 무서운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책이 정말 많았다. 마치 책으로 이루어진 밀림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맞다. 서점은 정글이었다. 더군다나 눈으로 보는 오프라인 서점도 이 정도인데 온라인 서점에 가면 더욱더 많은 책이 포진해있다. 큰일났네…


여기서 ‘책’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책이라는 기이한 생명체에 관한 진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는 요상한 비밀이다. 책은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는 경계가 매우 주관적이다. 역으로 말하면 열심히 만들기만 해서 좋은 책이 되는 것도 아니요, 적당히 대충 만들어도 어떻게든 책은 나온다는 것이다. 내용은 진짜 허접한데 외관만 멀쩡한 책이 있고, 너무 좋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이 안타까운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책을 짓는 사람의 마음밭이 중요하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모든 안테나를 세우고 노력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요상한 비밀은 이 모든 ‘제품(책)’이 마켓의 단계 구분 없이 무조건 ‘서점’에서 똑같이 팔린다는 것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재래시장표 홈웨어나 프랑스 파리 명품 브랜드 정장이나 모두 한 장소에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독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적절한 책을 구분하는 영리함을 갖춰야 하고, 출판사는 1인 출판사든 대형출판사든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대결을 펼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1인 출판사 입장에서는 떨리기도 하지만 도전할만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독자가 아닌 출판인으로서도 이 무시무시한 정글을 사랑하게 됐다.



오늘의 잇 쏭!

눈치 빠른 독자는 모두 알아챘겠지?

당연히 Guns N' Roses ‘Welcome To The Jungle’

젊은이들은 영화 <주만지>의 머슬남 드웨인 존슨을 떠올리겠지만,

중년이라면 바로 엑슬 로즈 오라버니의 어여쁜 리즈 시절을 생각할거다.

간만에 록 스피릿을 불태워보자!


Welcome to the jungle, we've got fun and games
We got everything you want honey, we know the names
We are the people that can find whatever you may need
If you got the money, honey, we got your dis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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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정글에서 생존중인 출판사 홈페이지


살아 남은 출판사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floorworx_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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