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강술래와 무척 닮은 책 짓기

가장 아름다운 원을 만들기 위한 고수들의 숨은 노력


"강강술래와 무척 닮은 책 짓기"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동네의 부녀자들이 모두 나와서 손에 손을 잡고 커다란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를 외치며 빙빙 돌았다. 임진왜란 때 적을 교란할 목적으로 수병(水兵) 수가 많아 보이게 부녀자들에게 남장을 시킨 교란 작전 놀이가 기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강강술래는 원시시대부터 보름날에 행해졌던 주술, 기원이 담긴 놀이였고,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 민속놀이로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나도 초등학교(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 시절 운동회 날 한복 입고, 묶은 머리에 댕기를 달고 강강술래를 했다. 전 학년이 참가한 강강술래가 절정에 달하면 반별로 나눠서 ‘기와밟기(또는 놋다리밟기)’까지 했다. 여기서 기와밟기가 무엇인지 잠시 부연 설명을 하면 ‘스우파’, ‘스걸파’ 같은 댄스 배틀에 반드시 나오는 동작이다. 군무 중 나머지 댄서들이 일렬로 엎드려 있으면 보조 댄서가 양쪽에 서서 메인 댄서 손을 잡고, 메인 댄서는 카리스마 넘치게 카메라 삼킬 기세로 나머지 댄서의 등을 밟고 우다다 걸어 나오는 동작이다.

강강술래 중 <기와밟기> (출처 : 금성출판사)

민속놀이 강강술래에서는 카리스마 요런 거 싹 제거하고 매우 우아하고 조신하게 걸어야 한다. 강강술래는 약간 느린 긴중모리 장단에서 시작해서 매우 빠른 자진모리 장단까지 이어진다. 이 놀이가 참으로 신기한 게 처음에는 약간 지루할 정도의 템포였다가 막판에 가면 고강도 GX를 한바탕 뛰고 있는 기분이다. GX는 적어도 손에 손잡고 하지는 않는데, 강강술래는 옆 사람 손을 계속 잡고 있어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옆 사람과 속도를 맞추며 냅다 달려야 한다. 마지막에는 모두 자진모리 장단에 맞춰 홀린듯이 미친듯이 달린다. 아름다운(?) 놀이를 완성하려면 모두 함께 손잡고 합체가 된다. 이 과정은 단순히 물리적 합체가 아니라 화학적 합체, 즉 제대로 된 케미가 발생해야 보는 이들 눈에도 아름다운 놀이로 승화한다.



내가 저자였던 시절에는 내 책이 나오기까지 뒤에서 많은 사람이 뺑이치기 수준의 강강술래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좋은 원고를(그 당시 스스로 엄청 훌륭한 작가라고 착각에 늪에서 접영 하고 있던 시절이었음) 책 만드는 몇몇 전문가가 ‘스투페파이!’라고 주문을 외치면 세상 모든 사람을 기절시키는 마법 같은 내 책이 등장할 거라 생각했다. 실상은? 절∙대∙아∙니∙다!!

오만했던 나를 비롯하여 이 세상 대부분의 초보 작가는 출판사에 원고를 턱~ 던져주면 마법의 함수 상자를 거쳐 책이라는 완제품이 툭~ 나온다고 착각한다. 직접 책을 지어보니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원고라고 해도 절대 그 상태 자체가 책이 될 수 없었다. 원고지나 A4, 혹은 PC 화면에서 읽었던 훌륭한 문장을 직접 교정지에 앉히고 보면 자르고, 닦고, 매만지고, 고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



민낯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까지 총괄하는 역할은 ‘편집자’가 맡게 된다. 편집자는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일이 마치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와 비슷하다. 편집자는 완전 원고가 나오기까지 저자를 달달 볶기도 하고, 채권자가 채무자한테 빚 독촉하듯 구걸에 가까운 협박을 한다. 편집자가 되고 보니 명함 한쪽면 가운데에 “원고 언제까지 주실 거예요?”를 궁서체 볼드로 크게 적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모든 편집자의 슬로건은 ‘원고 언제까지 주실 거예요?’였다.

윤문(潤文)은 단어 뜻 그대로 글에서 윤기가 나도록 문장이 매만지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교정자’가 한다. 교정자는 윤문, 교정, 교열 작업을 함께 한다. 비문(非文)을 올바르게 고치고, 맞춤법, 띄어쓰기, 원어 병기나 주석, 출처 등이 정확한지 전부 검열한다. 이렇게 한바탕 추스른 원고는 다음 주자 ‘디자이너’에게 넘겨진다. 날것의 원고를 예쁜 책으로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는 편집자와 함께 책 판형을 고민하고 내지 조판 작업을 한다. 때로는 표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서 표지 작업이 선행되기도 한다. 이렇게 원고를 흘린(책 본문 내지에 원고를 앉히는 작업을 뜻한다) 교정지가 다시 편집자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첫 번째 교정지다. 교정지는 저자, 교정자, 편집자 (순서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가 모두 돌아가면서 본다. 1 교정쇄는 거의 걸레 수준이다. 나 역시 저자일 때 마치 교정지에 새 글을 쓰는 수준으로 문장을 많이 뜯어고쳤다. 편집자 입장에서 저자가 처참하게 수정을 넘어서 새롭게 탈고했다 싶은 1 교정지를 보면 ‘이 사람이 장난하나?’라는 생각이 약 10분 정도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열∙교정자의 교정지를 동시에 받아보면 허탈함이 가라앉으며 조금 차분해진다. 교정자들은 보통 말보다 모든 수정 사항을 교정지에 표시한다. 편집자나 저자가 발견하지 못한 본문의 오류를 귀신같이 잡아낸다. 그래서 교정자의 교정지를 보고 있으면 친절하게 쓴 해설집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교정지 자체로 큰 공부가 되는 대목이다. 편집자는 이 모든 교정 사항을 재검토해서 취합, 선택한 후 출력 원고든 파일에 깔끔하게 정리해서 하나의 교정지로 만들어 디자이너에게 재차 넘긴다. 디자이너는 1 교정쇄 작업의 노고가 무색하게 새 책을 조판하는 기분으로 2 교정쇄를 만든다. 이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거쳐서 3교까지 보면 최종 인쇄본이 나온다. (1교, 2교, 3교 교정지가 왔다 갔다 토스하는 과정이 배구 선수, 테니스 선수, 탁구 선수 공주고 받듯이 매끄러우면 최상인데,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가 않다)

이때부터 편집자는 다시 바빠진다. 디자이너와 고심 끝에 인쇄 종이를 선정하고, 후가공 방법을 결정하며 인쇄 제작 발주서를 작성한다. 인쇄 공정부터는 편집자와 '마케팅 담당자'와의 교집합이다. 편집자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그림대로 책을 완성하고 싶고, 마케팅 담당자는 계산기를 두들기고 엑셀을 돌리며 손익분기점을 따진다. 마케팅은 어떤 전략으로 책을 배본하고 동시에 어떻게 책을 홍보할지 각 서점 MD들과 끊임없이 접촉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 나와도 배본과 홍보, 마케팅이 뒷심을 발휘하지 않으면 책은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홍보, 마케팅 담당은 브랜딩 자체에 중점을 두고 단기, 중기, 장기적인 모든 방법을 기획해야 한다.

책 한 권을 위한 막바지는 편집자가 '인쇄소'에 가서 인쇄 감리를 보는 순간이다. 인쇄기가 돌아가고 담당 기장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최상의 색상을 위해서 매의 눈으로 감리를 봐야 한다. (내 경우는 무척 운 좋게 이 모든 공정에서 모든 전문가가 초보 편집자인 나를 도와주고 이끌어줬다. 각 과정을 담당한 최고의 협업팀에 대한 에피소드는 다음 편에 소개하겠다)

이렇게 격정의 책 짓기 강강술래를 하고 자진모리 장단쯤 도달했을 때 ‘기와밟기’를 한다. 여기서 등을 밟고 걸어가는 사람은 ‘책을 손에 든 저자’이고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편집자’다. 그리고 저자가 출판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편집자는 도와주고, 나머지 과정을 담당했던 전문가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등을 밟고 지나도록 해준다. 저자가 걸어갈 때 엎드린 한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며 ‘아이고 허리야! 나 안 해!’하면 아름다운 강강술래는 그걸로 '땡'이다. 그래서 책을 짓는 모든 사람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고, 숨이 턱 막혀도 같이 달리고, 허리도 숙이고, 예쁜 원도 만든다. 이래도 원고만으로 책이 뚝딱 나온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오만한 저자에 대한 디스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출판사 첫 책의 저자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저자로서 두 권을 책을 썼고 다섯 권을 책을 만들어 보고 나서야 책 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백 분 이해했다. 물론 지난한 이 모든 과정은 책 짓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책이 좋아서 책을 만들겠다고 한 이상, 우리의 노고를 알아달라고 징징거릴 필요는 없다. 원석과도 같은 원고를 가장 빛나게 가공하는 역할이 우리가 할 일인 것을… 문장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독자들의 마음에 쉽게 전달하는 일에 가장 보람을 느낄 것이다.


책 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다.

우리는 더이상 적을 쫓아낼 필요도 없다.

그저 아름다운 최고의 강강술래를 완성하고 싶은 거다.

서로 보지도 않으면서 대충 손잡고 설렁설렁 대충 합 맞춘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진짜배기 케미 폭발로 탄생한 멋진 '한 권의 책',

그것으로 족하다.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모든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노고가 쌓여야 좋은 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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