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가 다는 아니더라_교열교정 에디터
출판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부분 조용하다.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고, 활발한 사람 같아 보여도 막상 일에 몰입하면 원고와 교정지와 시안으로만 대화한다.
이럴 때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업무 중 이메일이나 카톡 내용이 잘 이해가 안 되면 바로 ‘통화 가능하세요?’란 문자를 남기고, 손가락으로 자판 옆을 똑똑 두드리며 답변을 기다린다. ‘네’라는 답이 오자마자 핸드폰을 잽싸게 낚아채서 바로 전화를 하고, 몰랐던 내용을 목차순으로 다다다~ 물어보고 나면 그제야 답답함이 좀 해소가 된다.
그러나 통화를 마쳤더라도 반드시 문자나 이메일로 협의 내용을 정리해서 남겨놓는다. 문서로 남겨야 서로 실수가 없다. 이쪽 분야의 사람들과 일하면서 말을 아끼는 대신 활자로 소통하는 법이 조금 더 익숙해진 결과다.
출판사를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책을 제작하면서 우려했던 건 1인 출판사라는 시스템에서 모든 공정을 외주로 돌렸을 때 과연 내가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느냐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팀을 만들고 인력을 채용한다고 해서 100% 내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반대로 생면부지 사람들과 첫인사를 나누고 바로 작업에 돌입, 이 모든 합을 맞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한 모험이었다. 게다가 발주를 주는 ‘갑’이 일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 이건 모험이 아니라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무지한 ‘갑’과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지는 건축을 잘 모르고 돈주머니를 움켜쥔 건축주님들을 모셔봐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 무지하다 못해 무능하기까지 한 ‘갑’의 자리에 슬쩍 방석을 깔고 앉은 셈이다. 건축주의 갑과 편집자 갑의 위치는 엄연히 다르다.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턴키 방식으로 일을 맡기면 되지만, 편집자는 모든 것을 알고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저는 이 분야가 처음입니다. 잘 모르지만, 많이 가르쳐주십시오.’도 한두 번이지, 일하는 내내 ‘제가 잘 몰라서…’를 계속 언급하는 것은 프로의 자세가 아니지. 예전 TV 만화 '딱다구리’에 나오던 허둥지둥 곰처럼 좌로나 우로나 어쩔 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는 꼴을 보이게 된 거다.
과연 좋은 외주 제작자들이 나와 함께 일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 채 직접 소개를 받거나 한 다리 건너 소개받아서 직접적인 제작 공정에 주축이 되는 팀을 꾸리게 됐다. 외주 형식이지만, 출판사를 망해 먹지 않는 한 한번 만들어진 팀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싶은 건 당연한 바람이었다. 현재 우리 출판사와 컨소시엄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두 팀은 교정, 교열 에디터와 북 디자이너다. 다른 출판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 이 두 사람은 내 머리로 기획한 것을 책으로 만들 때 현실성에 가장 근접한 정보를 주고 때로는 친절하게(?) 쓰디쓴 팩폭을 여지없이 날려준다. 인쇄 외주를 담당하는 팀, 각 서점만의 특색있는 MD들, 마케팅 담당자, 보도자료를 쓰며 만난 문화계 언론인 등, 내가 만난 업계 종사인들은 출판계라는 내가 속해 있지만, 다른 일반 세상과는 괴리감이 있는 이 신비한 세상에 걸맞은 방식을 하나씩 꼭꼭 씹어먹도록 조용히 지켜봐 준다.
2019년 출판사 첫 책을 만들 때 내가 저자인 관계로 내 원고를 객관화해서 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저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칫 스스로 자만심에 빠져서 책을 냈다가는 출판사를 개업하자마자 곧바로 폐업 신고를 하는 스펙터클한 결말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곰의 자승자박을 피하려면 전문성을 지닌 객관화가 필요했다. 첫 책이 발레책이다 보니 일반적인 교열교정자가 모두 일을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열교정자는 각자 전문 분야가 있다. 만화(또는 드라마) ⟪중쇄를 찍자⟫(마츠다 나오코著)에 교열자들의 지조와 높은 자존감을 그린 에피소드가 있다. ‘교열은 너무 나서도 곤란하고, 물러서도 안 된다’라는 희대의 명언이 등장하는데 나 역시 책을 만들때 이 글을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고 책을 짓는다. (아울러 소설(또는 드라마) ⟪교열걸⟫(미야키 아야코著)도 교열에 대한 주제인만큼 꼭 읽기를 추천한다.)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희귀한 발레라는 콘텐츠로 출간하겠다는데 출판사의 첫 책이요, 편집장이라는 사람은 초짜다. 믿음을 줄 수 없는 선장을 따라 승선할 교열교정자는 없었다. 이런 어려움 중에 기적처럼 편집자 출신의 인친으로부터 한 교열교정 에디터를 소개받게 됐다. 베테랑 ‘에디터 K님’ 역시 발레책은 처음이었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로지 교정지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에디터 K님과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라면 이렇게 무지한 출판사와 일하기를 꺼렸을 것 같다. 출판계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책을 내겠다는 열정만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열기구 수준이라면, 아마 나는 중도에라도 열기구 불 끄고 그냥 하강해서 무사히 착륙하라고 쓴소리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에디터 K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무식한 편집자에서 평범한 편집자 수준으로 만들어줬다.
2019년 맺은 첫 인연은 현재까지 이어졌고, 우리 출판사 모든 책 판권지 ‘교정’에는 그분의 이름이 등장한다. 한 일에 비해서 너무 겸손하게 이름 세 글자만 달랑 쓰여 있어서 마음속으로는 이분 이름의 폰트 사이즈를 키우고 볼드체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한가지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나와 에디터 K님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첫 책 출간이 2020년 봄, 바야흐로 코로나 시국이 고개를 쳐들고 모두의 두려움을 파고들던 시기였기에 직접 대면이 지연되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이메일, 문자, 카톡, 때로는 통화, 그리고 오로지 교정지로 주고받으며 소통을 해왔다. 서로 사는 곳도 좀 멀고, 우리의 일이 굳이 대면으로 할 필요가 없기에 그냥 지금의 방식으로 이모티콘을 거의 배제한 포멀한 문자로 작업을 주고받는다. 어떨 땐 만난 적이 없는 에디터 K님이 비현실적인 존재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의 든든한 안전망임은 틀림없다.
최근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왔다.(에디터 K님과 전화로 첫 작업 구두 계약했던 장소도 지하철이었다) 에디터 K님의 MBTI가 뭘까 싶은 거다. (개인적으로 MBTI를 썩 신뢰하지는 않지만, 인간 성향 대강의 범주를 나누기에는 꽤 괜찮은 분류법 같다) 궁금함에 바로 문자를 보냈다.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에디터님 MBTI 뭐예요?”
역시나 드라이한 답변이 왔다.
“ENFJ입니다. 학교 다닐 땐 I였는데 E로 바뀌었네요.”
잉? 뭐라고라고라? ‘E’라고? 언빌리버블! 당연히 ‘I’라고 생각했다. 에디터 K님의 MBTI를 알려준 문자는 영화 <식스 센스>에서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I see dead people” 대사를 듣고 2초간 정적 후 ‘뭣이라!!!’ 표정을 지은 브루스 윌리스 수준의 충격이었다. 직관적이면서도 냉철한 교정지에는 외향성보다는 극단의 내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항상 정해진 시간에 작업 장소에서 여러 교정지와 씨름을 하는 에디터 K님, 교열교정자라는 직업이 주는 반듯함과 고도의 집중력, 그리고 언제나 칼같이 마감 기일을 지키는 것 때문에 은둔형 내향적 인간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 출판사의 2021년 출간한 시리즈 [더 발레 클래스]가 나름 대박이 났을 때다. 에디터 K님께서 작업실이 아닌 교보문고 홍대점에 출동하셨다. 그리고 시리즈 네 권의 재고를 확인하고, 인증 사진을 찍고, 심지어 서점에서 직접 책을 사셨다. 증정본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교정을 본 그 책을 말이다. 돈을 주고 사고 싶었단다. 그 내용을 늘 그렇듯 전화 통화가 아닌 문자로 보내줬다.
덤덤하게 문자를 보냈지만 분명 우리 출판사가 망해 먹지 않은 것이 너무 기특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네 권을 한꺼번에 낸다고 할 때 걱정이 앞섰지만, 묵묵히 초보 편집자를 도와준 자신이 대견했을거다. 이모티콘 없는 문자에 그런 츤데레와 약간의 달뜬 흥분이 묻어 있었고, 나는 그걸 텍스트 너머로 읽어낼 수 있었다.
짧은 순간 MBTI를 듣고 이렇게 퍼즐 맞추는 모양새가 마치 나이트 M. 샤말란의 특기인 15년 뒤 뿌린 떡밥 주워 담기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4년 내내 함께 일한 동료의 성향도 제대로 모르고 내 멋대로 상상한 나의 한계였던 거다. 그러고 보니 내 MBTI는 나름 희귀한 INTJ다. 가끔 ‘E’가 아닌 ‘I’였어? 라는 말을 들으면 ‘니들이 모르는 내가 있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짓는다. MBTI 결과도 꼭 맞는 건 아니었고, 이쯤 되니 출판인들이 대부분 조용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야 했다. 어쩌면 입으로는 조용해도 교정지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 왁자지껄하게 글로 써대는 교정자의 소란스러움을 언제나 존경한다. 교열교정자의 손을 거친 교정지가 나를 진정한 편집자 세계의 문을 열게 만들어줬으니까.
발레를 전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권의 발레책 교정을 마치고 그 어떤 전문가보다 발레 동작 용어와 작품, 안무가의 이름을 꿰차고 있는 에디터 K님, 첫 책을 낼 때 동작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책상 앞에 서서 원고에 쓰인 대로 일일이 동작을 직접 해봤다는 담담한 문자는 찐 감동을 줬다. 앞으로도 우리 출판사 책의 판권지에 오래토록 이 분의 이름이 함께 하기를 진심을 다해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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