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중고책 구매
일제가 미제만큼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을 조금 미워하면서도 우리보다 우월한 선진국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강남역, 종로 일대에 영어 학원이 널린 만큼 일본어 강좌도 많았고, J컬처의 콘텐츠는 우리를 사로잡았다. J-pop, 재패니메이션, 일본 문학, 일본 건축 등 서양과는 다른 독특한 이국적 정서로 우리를 인도했다.
재패니메이션 중심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브랜드이자 영향력 있는 콘텐츠다. 대물림하면서 전성기 흐름이 퇴색됐다고 해도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하야오를 제외할 수 없다. 며칠 전 인스타를 열었다 방송작가 김세윤 씨의 포스팅과 신지혜 아나운서의 댓글을 보고 바로 이 책을 찾았다. 아쉽게도 절판. 원래 중고책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책은 무조건 사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침대에 누운 채로 32,000원 결제하고 중고책을 구입했다.
‘맞아! 일본 문화가 이 정도였지?’를 외치게 한 책. 우선 원서보다 훨씬 더 책을 잘 표현한 현암사에 박수를 보낸다. 개인적으로 띠지, 재킷 표지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의 띠지와 재킷 표지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표지의 매트한 흰색과 모노톤의 띠지. 특히 약간 멍 때리는 유쾌한 표정의 미야자키 하야오 사진도 잘 어울린다. 세로 쓰임을 하는 일본어 느낌을 살린 표지 디자인도 훌륭하다. 심지어 재킷 표지에는 책에서 소개한 동화 제목을 양각 엠보로 후가공을 했다. (디자인, 편집팀 이 책 만들 때 약간 미친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책은 무려 사철 제본이다. 사철 제본은 제작비가 비싸다. 무선 제본이 나오기 전에는 전통적으로 책 매는 방식이 사철 제본이었다. 실로 얼기설기 매어놓은 책등의 투박함을 감추려고 예전에는 사철제본 위에다 불투명 비닐 재킷을 씌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빈티지한 이 느낌을 살리려 일부러 사철 제본 책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또 하나의 트렌드다. 출판계의 노출콘크리트 마감이라고나 할까? ㅎㅎ
⟪本へのとびら⟫ 원제를 한국어 ⟪책으로 가는 문⟫이라고 번역했다. 하긴 도비라가 문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중의적 표현에 가깝다. 책에서 속표제지를 도비라라고 하니, 단순한 문이 아닌 속표제지를 의미한다. 本への가 동사의 간다 표현보다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은유적 의미가 있기에 좀 더 상징적인 표제가 어땠을까 싶다. 지금도 근사한 제목이지만 ‘책으로 가는 문’이란 표현은 은유의 한층 위에서 표류하기에 이 책이 뜻하는 의미를 알기가 어려웠다. (이건 철학책이 아니라 소년문고의 동화를 소개하는 책이라고!)
어쨌든 책을 받고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해서 매우 기뻐하다 책을 열었는데 재킷 표지를 책과 일체로 붙여놓은 번쩍거리는 셀로판테이프에 극대노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딴 식으로 테이프바리를 해놓는단 말이냐. 도서관 책도 아닌데!!
조심스럽게 책에 발라놓은 테이프를 제거하고, 다시금 책을 봤다.
요즘 들어 물성인 책으로 가장 맘에 든 책이다. 2011년 일본에서 초판, 우리나라에는 2013년 초판 1쇄 본을 구했는데, 왠지 2쇄까지 안 갔을 것 같다. 당시 책 가격은 13,000원. 아… 진짜 너무 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출판을 해보면 감이 온다. 팔릴만한 수량과 디자인적으로 내가 구현하고 싶은 고퀄의 책 사이에서 끊임없는 밸런스 게임을 한다. 종잇값, 인쇄비, 인건비, 배본 창고비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은 요즘 여전히 내가 원하는 고퀄의 책 제작을 고집하다 출판사 망해먹기 십상이다.
“책 덜 예쁘게 만들고 많이 남길래? 좀 더 좋게 만들고 적게 남길래?”의 질문 앞에 항상 후자 쪽을 선택하기 때문에 나는 책 만들고 팔아서 부자가 되긴 애초에 글렀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기쁘고 아쉬웠다.
지금도 너무나 잘나가는 출판사지만, 이 책을 20,000원에 판다고 해도 나는 살 것 같다. 실로 절판시키기 너무 아까운 책.
나는 다행이다. 초판본을 소장했으니.
게다가 일본 문화의 황금기를 이렇게라도 책으로 간직할 수 있어서, 그걸 기억할 수 있어서 더욱 다행이다.
글, 사진: 에디터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