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발레월드>의 마지막 챕터가 시작되었다. 발레에 관심도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발레도 해보았고, 공연 관람도 하고 이제 발레가 그렇게 낯설지 않다면 집에서 편안하게 발레에 관한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친밀감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번 챕터에서는 발레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고 꼭 봐야 할 영화 세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부제: To Baryshnikov, For Baryshnikov, By Baryshnikov...
발레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라면 '유리 그리가로비치'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있지만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도 인기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의 러시아 남자친구로 나왔던 키가 좀 작은 듯해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독특한 영어 악센트를 가진 잘생긴 배우를 기억할 것이다.
1985년 영화 백야(White Nights)가 개봉을 했고 나는 이듬해 1986년도 중학교 1학년 때 이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때도 역시 발레라는 분야는 무용의 한 장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중학생 소녀의 눈에도 이 영화는 꽤나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남자 배우가 추는 춤이 생전 보지도 못한 동작이었지만 신기하고 멋있었고 결국 영화가 끝날 땐 같이 영화를 봤던 우리 언니와 나는 이름도 입에 잘 안 붙던 러시아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열혈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인터넷 검색 따위가 전무하던 시대라서 그저 비디오가 닳을 정도로 계속 보고, 그 이후 바리시니코프가 나온 영화 지젤(Dancers)을 극장에 가서 직접 관람을 했다.
중년의 나이에 취미발레를 시작하고 영화 <백야>를 다시 보았다. 사람이 간사한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나이 들어서 다시 본 영화 백야에서는 첫 장면에서 그냥 훅~ 빠져들고 말았다. 이게 발레 영화인지 말보로 담배 공식 광고 영화인지 혼동이 갈 정도로 특정 브랜드 흡연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저렇게 담배를 피워대는데도 저런 피루엣과 점프가 나온단 말이야?'란 생각도 들었고, 놀라운 것은 그가 춤도 잘 추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매끄럽게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니 발레 외에도 영화나 드라마 등에 출연하며 엔터테이너의 면모를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냥 발레 하다가 엔터테이너로 전향한 사람일까? 대답은 "NO"이다. 바리시니코프는 실제로도 발레 역사에 남을 만큼 위대한 무용수 중 하나이다. 영화 백야에서도 보면 첫 장면(내가 최근에 보고 훅~간 장면)에 나오는 누워있는 그를 향한 바스트 샷에서 자연스럽게 춤으로 연결되는 카메라 워크의 공연장면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공연을 보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의 춤이 한 눈에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잔여 동작(extra movement)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움직임은 발레의 기본 동작 안에 있고, 그래서 심지어는 연기를 하는 손동작, 걸음걸이 하나도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가 느껴질 정도였다. 키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신체의 비율이 워낙 좋고 탄성 좋은 활시위처럼 팽팽한 몸의 움직임이 있기에 그가 추는 어떤 춤도 지루함이 없다.
영화의 내용은 미국과 소련(러시아 아니다)의 냉전시대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니콜라이(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비행기가 사고로 소련에 불시착하게 되면서 소련에 구금이 되고, 자유를 갈망하는 니콜라이가 미국에 가기 위해서 탈출을 하는 그런 내용이다. 내용은 지극히 헐리웃 영화스러워서 비바 아메리카~!!, 니콜라이는 다 가진 남자!! 무용수 하나로 인해서 자칫하면 전쟁도 나겠네~!! KGB는 악랄한 인간들~!! 소련 인간들은 전부 딴짓하고 게을러~!! 등등 살짝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어쨌거나 한 명의 무용수로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영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전달된다. 실제로 이 영화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자전적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장면이라고 하면 첫 공연에서 의자를 타고 넘는 씬 (일명 예전 국내 리복 광고에서 배우 이종원 패러디한 그 장면, 이후 많은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자빠지며 연습하던 그 장면), 그레고리 하인즈와 1피루엣 1루블이라는 내기로 11루블을 걸고 셔츠 입고, 정장구두 신고 한자리에서 열한 바퀴 앙디올 피루엣을 깔끔하게 해내는 씬 (역시 세계의 모든 발레 좀 한다는 사람들이 꼭 도전하게 만들었던 그 장면), 키로프 극장에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의 야생마(Fastidious Horses) 노래에 맞춰서 즉흥적인 격정적으로 춤추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 <백야>에서 키로프 극장에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 (1985)
하지만 내가 다시 본 백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조지 발란신을 기념하는 공연에 관한 이야기나 탈출 전 키로프 극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극장을 돌아보던 회한의 장면, 그리고 역시나 취미발레인의 관점에서 보면 춤추기 전에 시원하게 스트레칭하면서 워밍업 하는 장면이었다.
영화 속 워밍업 장면. 보는 내 어깨가 다 시원해진다. (영화 백야, 1985, 출처;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이렇게 쫘악 찢어줘야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들듯 (영화 백야, 1985, 출처;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영화사적으로 이 영화의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발레에 관심이 있거나 애정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이상은 봐야 한다고 생각되는 영화이다. 발레가 아직까지 대중적인 예술은 아니지만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라는 배우가, 아니 발레리노가 이 한편의 영화로 발레에 대한 편견을 얼마나 많이 없애주었고, 발레는 어렵다는 선입견을 상당히 낮춰 주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그의 노력 덕분에 그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남자친구로 나와서 발레 동작 하나 하지 않고 제법 배우다운 모습으로 연기를 해도 흔히 말하는 변절자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40대에 무릎 부상으로 은퇴를 고민하다가 현대무용으로 전향하고, 배우, 사진작가, 안무가, 공연기획자, 심지어 60대에서 무대에 서는 열정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서지만 그는 영원히 훌륭한 발레리노이자 대중과 클래식 발레의 가교 역할의 선구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직도 왕성히 활동하는 그에게 조용한 응원을 보내본다.
67세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에너지가 넘친다 (Rag-bone NY 화보, 2015, 출처;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마사 그레이엄과의 프로젝트. 한참 현역 시절 거의 자기 키만큼 점프를 했던 바리시니코프 (출처;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발레는 이렇게 몸으로 말하는 언어이다. (출처;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글 : 취미발레 윤여사
*사진출처 :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페이스북 커뮤니티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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