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간 지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알콜러버로 활동했습니다. 알콜 먹는 하마처럼 참으로 많은 술을 꼴깍꼴깍 삼켜댔습니다.
너무나 예측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내가, 술에 취하면 살짝 나사가 풀려 예측불가능한 행동과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와인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샵을 제집처럼 들락거렸고, 매주 새로운 막걸리 탐방을 했죠. 맥주 신상품이 나오면 편의점에 달려가 종류별로 구매하기도 하고요. 주류박람회가 열리면 두 손에 다양한 술을 잔뜩 사서 돌아오는 걸 자랑처럼 여겼습니다.
술 덕분에 재미난 추억도 참 많이 생겼습니다.
"딱 말해. 나랑 사귈 거야, 말 거야?"
초겨울에 시작된 A와의 연락은, 벚꽃놀이를 다녀와서까지 애매한 관계였습니다. 사귀긴 싫고, 그렇다고 남 주긴 아까운 그런 애매한 관계 같아서 기분이 영 별로더군요. 하지만 "나 썸 싫어! 이제 사귀자!"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 먼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A에게 나만의 술 아지트를 소개해준 날이었습니다. 은은한 조명에 분위기 있는 음악, 맛있던 술까지. 기분 좋게 조금씩 마시니, 안 취할 거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다음 날, 그의 말에 따르면 저는 헤벌레 해서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계속했다고 합니다. "딱 말해. 나 이렇게는 더 못 만나. 사귀던지, 그만 만나던지. 선택해!" 얘기를 듣는데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고주망태가 따로 없네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귀 아프게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 덕에 연애를 시작할 순 있었습니다.
"나 이 노래 부르고 싶어요!"
친한 회사 동료들과 술을 진탕 먹고 노래방으로 2차를 간 날도 있습니다. 자우림 노래를 들으며 일을 했던 날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일했던 터라 내적으로 둠칫둠칫 리듬을 타긴 했죠. 노래방에선 늘 노래를 부르지 않고 구석에 짱 박혀 박수를 치는 역할에 충실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자우림 노래를 찾아 예약을 했죠. 근데 친한 회사 동료가 노래를 '취소' 시켜 버리는 겁니다. 놀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서 "왜 취소해요? 나 이 노래 진짜 부르고 싶은데..."라고 궁시렁거렸습니다. 동료가 목젖이 보이게 웃으며 "지금 다섯 번째 부르려는 거 알아요? 그만 불러요, 제발"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노래방에 같이 있던 동료들은, 그날 이후 저를 자우림에 반쯤 미친 팬이라고 생각합니다.
취기가 오르면 '마음'이라는 놈은, 정말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깊은 속마음까지 자기주장이 강해져, 기어코 입 밖으로 튀어나가곤 하니까요. 사실 그래서 술을 좋아했습니다. 솔직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문제는 블랙아웃 증상이었습니다.
25년 지기에게,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도 필름이 끊겼죠. 다음날 친구의 입을 통해서야 대화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힘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울고 있던 나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던 친구의 모습이었죠.
순간, 찐하게 감정이 통했던 순간은 온전히 기억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 정신에 얘기했다면? 그날의 이야기와 감정을 고스란히 다 추억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호기롭게 금주를 선언했습니다. (... 성공 가능성이 적어서... 절주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술을 먹지 않고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술에 취해야만 할 수 있던 이야기를 글로도 남겨보겠습니다. 진상을 부릴 수도 있겠네요. 어디까지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최선은 다해보겠습니다. 필름이 끊기듯, 글을 발행하고 나면 묵힌 감정이 뚝딱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알콜러버이지만, 금주선언을 해봤습니다.
아직까진 무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