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엄마
내 나이 여섯 살.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한테 빗자루로 두들겨 맞았다.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 흐릿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사진처럼 또렷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읍, 면 단위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그래도 나름 유아원도 있고 유치원도 있었다.
그날은 유아원에 처음 등원하는 날이었다. 엄마는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갔고, 반 배정을 마치자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은아,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이따가 (끝나고) 종이 울리면 사물함에서 책가방이랑 실내화 가방이랑 다 챙겨서 집으로 오면 돼! 알았지?"
그때 당시만 해도(아마도 1989년인 듯하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님 없이 혼자 혹은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를 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어쨌든, 나는 엄마의 말을 기억했지만, '(끝나고)'를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첫 종(시작종)이 울리자 나는 사물함에서 짐을 다 꺼내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집은 마당이 있는 작은 주택이었는데, 분명 유아원에 있어야 하는 내가 대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부엌에 엎드려 빗자루질을 하고 있던 엄마는 꽤나 황당했던 것 같다.
"너... 왜 왔니?"
"종이 치길래, 왔지!"
나는 당차게 말했고, 엄마는 맨발로 달려 나와 들고 있던 빗자루로 내 엉덩이를 몇 번 두들겼다.
"아유! 이노무 지지배!"
그때 처음으로 빗자루의 새로운 기능을 알게 되었고, 엄마는 엉엉 우는 나의 손목을 잡고 다시 유아원으로 향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얘가 두나랑 같은 반이 안 되니 심술이 나서 집에 왔나 봐요."
'엥?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람?'
엄마는 선생님께 비교적 이성적인 변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두나는 바로 옆집에 사는 단짝이었는데, 다른 반이 되어 속상하기는 했어도 내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엄마는 내가 덜 이상해 보이는 쪽을 선택한 것이리라...)
결국 나는 친구 없이는 못 사는 고집쟁이 여섯 살로 유아원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해 여름 엄마 생신이 돌아왔다.
마당에서 두나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추를 다듬으며 내게 엄마 생일인데 선물은 준비했냐고 물었다.
처음으로 엄마의 생일에 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고민했다.
옆에서 땅따먹기 금을 긋고 있던 남동생에게 다가가 우리가 뭔갈 해야 한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집에는 동생과 내가 마당에서 주운 동전까지 넣어두는 빨간 돼지 저금통이 있었다. 우리는 고민 끝에 돼지를 가르지는 않기로 하고 대신 동전을 넣는 구멍에 막대자를 넣어서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수 십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몇 백 원을 꺼낼 수 있었다. 두 손으로 동전을 쥐고 흔들면서 길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동네 슈퍼로 달려갔다.
먼저, 왕눈깔 사탕 네 개를 샀다. 언니와 두나 것을 잊지 않고 챙겼다. 사탕은 개당 50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온 목적으로 다시 돌아와 드디어 엄마의 생일 선물을 골랐다. 남은 동전이 얼마 없어서 주인 할아버지께 손바닥을 펼쳐 동전을 보여 주었다.
"이걸로 뭘 살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무게도 꽤 나가고 크기도 꽤 큰 물건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은 바로
빨랫비누였다. 직사각형의 투박하고 누런 빨랫비누.
우리는 ‘이거다!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볼에 왕눈깔 사탕을 하나씩 문 채 빨랫비누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아줌마들과 엄마가 다 같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동생과 나는 서프라이즈로 엄마의 생일 선물을 건넸다.
아줌마들은 깔깔 웃어고, 엄마도 함께 웃었다.
"애들이 엄마는 빨래하는 사람인 줄 아나벼!"
앞집 찬이 엄마가 매운 고추를 만진 손으로 눈물까지 닦으며 웃었다.
"형님도 참, 그게 아니라, 황금 같이 생겼으니께 좋아 보였던 거쥬!"
엄마는 찬이 엄마의 사투리를 따라하며 이렇게 받아쳤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엄마는 나중에 내게 돈을 조금 더 주며 스타킹으로 바꿔오라고 했다. 그렇게 누런 빨랫비누에서 살구색 스타킹으로 생일 선물이 교체되면서 이 사건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엄마는 나이 마흔도 채 안되었을 때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엄마는 아이 셋을 키우며 우리들 대신 여러 변명들을 해주었고, 빨랫비누를 생일 선물로 받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여섯 살인 나의 젊은 엄마는
지금은 많이 늙었다.
늙은 우리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자식들 티끌 보일까 걱정을 하신다. 누군가 자식들 꼬투리를 잡을 기미만 보이면 대화의 맥락에도 맞지 않게 민망한 칭찬을 하며 선제 방어를 한다.
마흔살인 나의 늙은 우리 엄마는
아직도 우리들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
그때도 지금도
미안해, 엄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