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Nov 10. 2023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

인연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쓴 단편소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를 두고 작가와 미스 마플이 가상 대담을 나눈다. 이 작품은 1926년 《문예시대(文藝時代)》에 발표했고 1927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후 영화로 제작되어 일본 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제일고보(도쿄대) 학생인 주인공 '나'는 늦가을 이즈(伊豆) 반도로 혼자 여행을 하면서 전통 유랑 가무단 일행을 만난다. 유랑 가무단은 젊은 남성 한 명과 나이 든 여성 한 명, 젊은 여성 두 명, 그리고 10대인 북 치는 소녀로 구성됐다. '나'는 가무단과 동반 여행을 하면서 신분을 의식하지 않은 채 스스럼없이 어울린 북 치는 소녀 '가오루'에게 점점 관심을 가진다.




마플 안녕하세요 가와바타님. 그동안 작가님 작품을 읽으면서 대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현이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작가님은 작품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감정 표현이나 말씀이 적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많은 말씀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하하.

가와바타  안녕하세요, 마플님. 아시듯이 소설가는 작품으로 말을 합니다. 현실에서 보고 듣고 알고 생각한 바를 자기 작품에 녹이지요. 제 작품에서 일본 자연 풍경이나 여성의 외모, 심리 묘사가 풍부하긴 하지만 등장인물 대화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작품에서도 대화보다는 묘사에 치중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오늘은 말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마플 인터뷰는 말을 아끼면 진행되지 않으니까요. 허심탄회하게 포문을 열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작품과 관련해 제가 궁금했던 점부터 여쭙고 싶은데요, 괜찮습니까?

가와바타 아, 살짝 긴장되는군요. '허심탄회'라는 말씀을 꺼낸 이유가 다 있었군요. 허허.

마플 하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작가님이 긴장을 하시게 만들면 제가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무례하지 않게 질문을 드리겠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으시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한국 독자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설국(雪國)》처럼 이 작품도 작가님의 자전적 실화에 기인했다는 말이 회자됩니다. 2014년에 발견된 편지 때문이지요. 기억나시죠?

가와바타 아, 보내지 못한 그 편지 말이죠. 처분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남아 있을 줄 전혀 짐작 못했습니다. 제가 스무 살 무렵에 쓴 편지니까 오래전 편지네요. 그 일화를 이 작품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 편지는 다 공개된 것처럼 상대방에게 파혼을 통보받고 실연의 아픔으로 썼던 편지입니다. 한편으로는 도무지 왜 우리가 파혼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나중에 늙어서야 그것 때문이었나 싶었습니다.




마플 연인이 헤어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작가님이 추정하신 파혼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와바타 먼저, 이 작품에 나오는 유랑 가무단 일행과 제일고보 재학생인 '나'는 신분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을 살펴주십시오. 이 소설이 발간된 1920년대만 해도 유랑 가무단은 사회 최하위층이었습니다. 개항이 되어 신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일본인 의식에는 봉건잔재가 많이 남았었지요. 제 약혼녀였던 이토 하쓰요는 카페에서 일했습니다. 도쿄에 있었던 카페이지만 요즘 말로 하자면 다방 레지로 부르거나 여급 정도로 해석됩니다. 저는 도쿄대 학생이었고요. 당시 도쿄대는 아무나 입학하기 어려웠어요. 주로 귀족 가문이나 부잣집 자제들이 다녔기에 상류학교인 것이지요. 성적으로 입학이 허용되는 현대에 이해가 안 가실 겁니다. 한마디로 당시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회구조는 여전히 신분과 성차별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유랑 가무단이나 카페 종업원인 제 약혼녀도 몸을 파는 여성으로 인식하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마플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성 정조를 더 따졌던 것일 수도 있겠어요. 소설에서 닭고기 음식점 주인이 닭고기를 먹는 소녀 어깨를 토닥이자 가무단 어머니가 벌컥 화를 내잖아요. 숫처녀인 아이한테 손대지 말라고 하면서요. 사람들이 가무단 여자에게 추근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에서 이 가무단은 사람들이 함부로 속단하는 것처럼 저질의 사람들이 아닌 모습으로 비칩니다. 일본에서는 유랑 가무단을 다비게닌(旅芸人)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이 작품에서도 유랑 가무단을 차별하는 사람들 인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기 고개를 넘어 비를 피하려고 들어간 찻집에서 유랑 가무단을 비하하는 찻집 노파가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오늘 밤 어디서 묵는지 아느냐고 주인공이 묻자 노파가 말하죠. "저런 것들이야 어디서 묵을지 알게 뭡니까요" 그러면서 유랑 가무단은 아무 데서나 잔다는 식으로 비웃습니다. 도쿄대 학생인 '나'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돈을 더 줬다고 감동까지 하면서 문 밖으로 배웅까지 한 노파였는데 말이죠. 한 번은 주인공이 여관에서 종이 행상과 바둑을 두다가 가무단이 여관에 도착한 걸 보고 다시 만나 반가워한 주인공이 일어나자 종이 행상이 쌀쌀맞게 말하죠. "저런 것들에게는 관심 없습니다"라고 말해요. 심지어 순박하고 친절한 여관 안주인조차 주인공이 가무단에게 밥을 사 주자 "저런 것들한테 밥을 주는 건 쓸데없는 일입니다"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가무단을 대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저런 것들", "저것들"이라고 불러요. 마음(mind)이 없는 사물(thing)로 대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적대적 관계에서 상대방을 가리키는 '무코가와(向こう側)'보다 더 얕잡아 부르면서 인칭 대명사 대신 지시 대명사를 쓰는 거죠. 가무단을 마치 불가촉천민처럼 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와바타 맞습니다. 유랑 가무단을 한국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군요. 일본에는 이 사람들이 떠돌아다니면서 춤과 노래만 할 뿐 아니라 절도, 강도, 폭행, 사기를 한다고 피했어요. 심지어 여성 가무단은 성매매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랑 가무단을 아주 천대했죠. 제가 약혼했던 이토는 유랑 가무단은 아니지만 남자들의 차 시중이나 술 시중을 드는 직업을 가졌으므로 정조를 지켰어도 남자들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근대화가 진행된 시대였어도 오랜 고정관념이나 관습이 쉽게 달라지지 않았지요.

마플 그렇군요. 한국에서는 유랑 가무단을 '남사당 패'라고도 부릅니다.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어요. 노래, 춤, 마당극은 물론이고 줄타기나 곡예도 했지요. 이들은 대개 가족이나 친척, 지인, 친구들끼리 모여서 조직을 이뤘던 것으로 압니다. 조직에는 수장이 있고, 행동대장도 있고 그랬지요. 일본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남사당 패도 사회적 신분은 최하위층이었습니다.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분계급에 얽매인 차별이지요. 한국은 당시 일제강점기였고 이때 많은 무리가 일제에 의해 타의 반 자의 반 소멸되었다고 해요.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이들은 소문과 정보에 민첩했고 이런 정보로 독립운동에 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본 것이지요.

가와바타 결과를 놓고 보면 일제 지배가 한국의 유랑 가무단 소멸을 불러온 것 같군요. 일본도 점점 유랑 가무단이 사라졌고 패전 이후 완전히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쨌든 제 약혼녀가 돌연 저에게 이렇다 할 설명 없이 파혼 편지를 보내온 것은 고학력자인 저와 카페 여급 출신인 자신이 신분 격차로 합쳐질 수 없다는 자격지심이 아니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예비 인텔리와 비교되는 자신의 초라한 상황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점을 제가 잘 이끌지 못했지요.

마플 에이, 이제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셨잖아요. 세세하게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지요. 자, 그럼 작가님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 소재로 썼다는 점에 인정하시는 건가요? 이 작품에 나오는 가오루(薫)나 약혼하셨던 도쿄 카페의 이토나 두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14세라는 공통점과 당대에 멸시받은 직업을 가졌고 부모님이 안 계신 점도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작품 속의 '나'나 약혼할 때 작가님은 도쿄대생이었고 스무 살 무렵이었고요. 작품과 현실이 너무 많이 비슷한 구조입니다.

가와바타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저는 밀란 쿤데라가 한 이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마플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하겠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인연", "평범한 호의", "아름다운 공허함" 같은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오루가 비 오는 날 여관 근처 식당에서 연회에 참석해 북을 치는 모습을 소리로 들으면서 '나'는 상념에 젖지 않습니까. "오늘 밤 무희가 더럽혀지는 것은 아닐까 괴로웠다"라고 걱정하죠. 결국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슴이 답답해 벌떡 일어나 탕에 들어갔지요. 괜히 탕 안의 물살을 거칠게 휘저으면서 엉뚱한 상상을 쫓아내고자 애를 씁니다. 물론 다음날 아침 공동탕에 알몸으로 목욕하러 온 가오루를 보면서 "어린 오동나무처럼 다리가 쭉 뻗은 흰 나체"를 보고 "어린애잖아"라고 안도합니다. 그 순간 지난밤부터 아팠던 머리가 씻은 듯 맑아졌다고 고백하잖아요. 하하하. 가오루는 성적 징후가 아직 안 보이는 미소녀였던 거죠. 저도 이 장면을 읽으면서 어쩐지 귀여워 웃음이 나왔습니다. 자칫했다가는 작가님이 소아성애자로 오해받을 뻔했습니다. 크크크

가와바타 소아성애자라뇨? 제가 비록 여성 외모를 관찰하기를 즐기지만 사리분별은 합니다. 식은땀이 나네요. 하하.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순수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받아들이더군요. 말씀하신 데로 상상은 독자의 몫입니다. 물론 너무나 순수한 감정이라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요. '나' 혼자 열일곱 살 성숙한 숙녀로 단정하고선 가오루에게 혼자 애달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뭇 남자에게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장면 말입니다. 자기도 머리를 풍성하게 치장한 가오루에게 여성으로서 연모 감정을 잠깐 가졌으면서 혹시나 연회에서 다른 남자와 가오루가 잠자리를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이중성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아직 고백도 못했는데 마음속의 내 여자를 뺏기는 게 아닌가 불안한 거죠. 이루어진 사랑이라고 가정해도 가오루와 '나'는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결혼으로 오랜 풍조와 인식을 뛰어 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례로 일본 왕족의 공주가 평민 출신과 결혼하면 공주는 평민으로 강등됩니다. 집안에서 받을 수 있는 경제나 법적, 사회적 특혜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사람들 입방아에 계속 오르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할 처지입니다. 집안의 무시와 사람들의 경멸적 시선, 사회 지위를 누리는데 따르는 불이익 등 두 사람만의 사랑으로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부담스럽습니다. 가오루는 소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잖아요. 글을 잘 못 읽어서 '나'에게 《미토코몬(水戶黃門)》같은 야담집을 읽어 달라고 조릅니다. 가오루는 아직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호기심 많은 소녀입니다. 바로 그 해맑음 때문에 '나'는 가오루를 단념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인상 깊었다고 하신 '인연'이나 '평범한 호의', '아름다운 공허함'은 "자신의 성질이 고아 근성으로 삐뚤어져있다"라고 여긴 나머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혼자 이즈 반도로 여행을 온 '나'와 아무런 계산 없이 어울린 가무단 일행의 따듯함에 외려 위로를 받은 겁니다. 이런 것이 좋은 인연이지요. 양쪽이 다 근사한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마플 '외려', 그렇습니다. 아주 적절한 어휘이군요. 그런데 '나'도 가무단에게 친절한 배려를 보여줬지요. 찻집이나 여관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무단과 대화를 나누고, 바둑을 두고, 책 읽어주고, 밥을 사 주고, 여행 중 죽은 아기의 49재에 꽃 공양하라고 돈을 주기도 했잖아요. 사회 최하층인 유랑 가무단에게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동등하게 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아 근성"이 심각한 '나'는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게 아닐까 생각 드네요. 때마침 그에 조응하는 가무단 일행을 만났고요. 이 이야기는 이렇게 탄생된 겁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무람했습니다. 여하튼 이 작품의 주제는 '인연'이라고 봅니다. 작품을 쓰신 입장에서 어떤가요?

가와바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가무단 일행 가운데 어머니가 여관에서 헤어지기 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인연으로 일행이 되셨는데" 시모다 항구에서 다시 만나자 이러죠. 그러면서 시모다 항구에 도착하면 여행 중 죽은 아기 49재를 지낼 예정이므로 명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나'도 시모다 항구에 같이 가자는 제안이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기의 명복을 빌어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이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라고 하거나 오시마에 있는 자기 집에 오라고 당부하거나 하는 말들에서 "이것도 인연인데"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요, 인연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합니다. 단순한 신분 차이를 초월한 인연이 아닌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숱한 인연을 가늠하자는 의도였습니다.




마플 아, 그렇군요.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요.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인연, 관계, 그리고 흔들린 마음을 떠올리면 이 작품의 말미에 나온 "아름다운 공허"라는 말이 그렇게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작가님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이 작품에서는 쓸쓸한 허무나 죽음의 그림자가 상대적으로 강렬하지 않습니다.

가와바타 아무래도 이 작품은 이십 대에 쓴 작품이고 순수한 인연을 줄기로 삼은 때문이겠지요.

마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떠도는 "유랑 가무단의 여정이 생각보다 고생스럽지 않고, 들판의 향기를 잃지 않은 육친다운 애정으로 이어졌다"라고 보잖아요. 고아 근성이 심각한 '나'의 입장에서, 또 어렸을 때 가족을 잃은 작가님 삶을 돌아보더라도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갈망한 건 아무런 격의 없고, 사심 없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부담이 안 되는 만남일 것 같습니다. 작품 마지막에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 이유가 가무단 일행과 헤어졌다는 아쉬움이라기보다, 가오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기보다, 외롭고 모난 '나'를 다정하게 받아준 '아늑한 환대'에 흘린 눈물이지 않을까요? 밤배 선실에서 흘리는 눈물을 "달콤한 상쾌함"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만.

가와바타 한국에서 비슷한 작품으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작품에서도 여행을 소재로 인연을 다루나요? 제가 이 작품에서 "달콤한 상쾌함'을 눈물에 대입한 것은 자기보다 훨씬 낮은 신분인 사람들이 잘난 체하던 엘리트 대학생인 자기와 꾸밈없이 소통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 자기가 했던 고민들의 부질없음,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던 삐뚤어진 시각을 자각하게 된 깨달음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너무 불교적 뉘앙스가 강해서 문학적으로 표현했어요.

마플 자각, 깨달음이라고 하시니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직업, 학력, 거주지역을 따지지 않는 존엄한 동등 의식도 이 작품의 분위기이지요. 황순원 작가가 쓴 《소나기》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렸었습니다. 감성이 예민했던 나이였으므로 기억에 남네요. 도시 출신 소녀와 시골 출신 소년의 못다 한 인연이 내용입니다만, 여행 대신 냇가의 조약돌과 소나기가 중요한 메타포로 나옵니다. 소녀가 소나기를 맞고 원인을 모른 채 죽습니다. 죽음으로 인연을 매듭짓는 이야기죠. 그러나 《이즈의 무희》는 그 후 그들이 다시 만났을 가능성을 열어뒀잖아요. 저는 그 후속 편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상상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가오루 한자 이름인 향풀 훈(薫)에서 비록 연약하고 볼품없는 풀일지라도 향기가 난다는 뜻이 인상 깊어요. 향풀은 바로 정제되지 않은 들판의 향기죠. 체면, 가식, 계획된 의도가 없는 원초적 자연 상태로 마음에 이물질이나 그늘이 없는 가오루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저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작가님의 따듯한 시선을 느낍니다.

가와바타 문학은 작가가 심어놓은 비유를 알아차릴 때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독자는 그 비유를 궁금해하면서 읽어야 이해가 확장됩니다.

마플 네. 문학은 지면 위의 세계이며, 문학을 읽는 일은 못 가본 사고의 여행지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 같습니다.

가와바타 지금은 한물간, 어쩌면 잊히고 있는 저를 초대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제 문학은 이렇다 할 강렬한 메시지가 없어서 밋밋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저는 성격이 밋밋한 사람으로 제 작품도 밋밋한 내용으로 재미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듯 읽으면 조금은 덜 밋밋하게 느끼실 겁니다. 작가는 문장에 많은 의미를 색칠합니다. 다음 작품에서도 다시 조근조근 대담을 나누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마플 이번 대담은 작가님의 청년기 작품을 다뤘고, 다음은 중년기와 노년기 작품을 다뤄볼 예정입니다. 돌이켜보니 제 인터뷰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많이 띄는군요. 다음 대담에서 보완하기로 하면서 이번 대담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플 합장(合掌)-


■참고도서 : 을유문화사/이즈의 무희





 

매거진의 이전글 모리 오가이 《아베일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