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마자 주택청약을 넣으라고 했다. 그래서 난 평생 한국에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왜 벌써부터 여기에 집을 사냐, 벨기에에 가서 살 수도 있지 않냐, 고 했다.
보험도 그렇다. 이십 년 동안 매달 일정한 금액을 꼬박꼬박 내는 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상해 보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행여 다른 나라로 유학이든 이민이든 가게 되면 해지하고 상환도 못 받을 텐데.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사는 게 나에겐 하나의 가능성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변수만 생각하더라도 이십 년짜리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나에겐 정신이 아득해지는 개념이었다.
난 오 년, 십 년, 이십 년 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5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라’ 같은 질문이 제일 싫었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씨알머리 없는 짓으로 보였다. 내일조차 알 수 없는데 무슨 언감생심 몇 년씩을 내다보겠다는 걸까. 다들 본인을 그 정도로 믿는 건지 하여간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고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주택청약과 보험도 몇십 년을 묶는 일이기 때문에 가까이 가기 싫었다.
내가 이렇게 장기적인 계획이나 약속 같은 것을 믿지 않게 된 건 아마 불안정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놀랍게도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처음엔 전혀 다른 방향의 전개를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유년 시절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엄마 아빠의 이혼이나, 재혼이나, 두 번째 이혼이나, 아빠가 오빠를 내쫓은 일,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있기 전 열세 살 때까지 살았던 그윽한 아파트 단지, 내 어린 시절을 받쳐 주었던 그곳이 앞으로의 일을 예고라도 하듯 전부 부서져버리고 그 자리에 각진 재건축 단지가 들어선 일까지, 죄다 내 기반을 송두리째 흔든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럴수록 더 단단히 대비하고 준비하는 경향을 키우기도 할 텐데, 난 그쪽이 아니었던 거겠지. 무언가를 장기적으로 도모하는 일은 다 공허하고, 연약하고, 내 약속과 믿음이 배신당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내 기저에는 미래에 대한 어떤 사소한 확신도 유예하는 태도가 자라게 된 게 아닐까.
하지만 삼십 대가 되니 그래도 좀 길게 보고 기반을 다지는 일이 필요하게 느껴진다. 경력을 쌓아야 하고, 돈을 모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집도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대책 없이, 뭔가를 해보겠다는 결심으로부터 도망치며 살 수는 없다. 어렸을 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밑바닥이 무너졌을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웬만하면 다 내 선택에 따른 결과일 테다.
얼마 전 엄마는 다시 주택청약에 가입해 다달이 십만 원씩 무조건 부으라고 했다. 몇 년 전 내가 벨기에 운운할 땐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처럼 들렸지만, 이제 엄마가 보기엔 계속 한국에 있을 것 같다는 거다. 일리 있는 말이다. 몇 년 전엔 코로나도 없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 ‘굴비’도 입양하기 전이었으니까.
이 글을 썼으니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해 볼 여지를 갖게 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왜 그렇게 미래지향적인 가치에 거리를 느껴왔는지, 나를 더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도 마음 속 방이 확장된 느낌이다.
이번 달부터 십만 원씩 부어볼까.
2022. 03.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