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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돈 코치 Oct 31. 2019

아들의 심장은 어머니의 손길이 만든다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 여사 이야기

한 어머니가 함경남도 흥남 솔안마을에 6남매 중 장녀였다. 한국전쟁통에 남편과 딸 함께 미군의 수송선을 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마침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 도중 미군이 피란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탕을 한 알씩 나눠줬던 것을 잊지 못한다.

거제도에서 임시로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서 머물렀다. 그 와중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낯선 곳에서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전쟁터에서는 생존이 중요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시절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 빈털터리’로 피란을 떠나온 사람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자리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수재로 불린 남편은 고향에서 농업계장을 지냈지만 거제도에서 사업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내는 집집마다 닭들을 몇 마리씩 키우니까 거기서 이제 달걀을 구입해서 아들을 업고 그 달걀을 머리에 이고 달걀 행상과 연탄배달을 벌이며 2남 3녀를 둔 가정의 생계를 꾸렸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끄는 연탄 배달 리어카를 뒤에서 밀며 아들은 가난을 절절히 느꼈던 경험으로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웠다.
가계 살림이 넉넉할 수 없었다. 아들은 도시락을 싸 온 친구들의 뚜껑을 빌려 미군 물자인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죽'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행상에 나갔다가 웃돈을 얹어서 물건을 파는 게 마음에 걸려 되돌아온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중·고교 6년 내내 공부하라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냥 믿고 맡겨주셨다. 항상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자주 해주셨다.
급기야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자 어머니는 좌판 옷 장사, 구멍가게, 연탄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겨우 이어갔다. 그래도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아 아들의 학교 월사금은 어떻게든 마련했다. 그럼에도 아들은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당시 지역의 명문 중·고인 경남중과 경남고를 차례로 입학했다. 아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묵묵한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으랴.

아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법대에 들어가 유신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구속됐다. 어머니는 '아들이 검찰로 호송된다'는 말을 듣고 일찍부터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차 뒤편 작은 구멍 밖에서 달려오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떠나는 차를 뒤따라 달리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호송차를 바라보고 계셨다. 마치 영화 장면 같은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아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혼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다.
아들은 가난하고 힘든 세월을 극복하고 변호사가 됐지만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은 훗날 아들이 인권변호사 길을 걷는 원동력이 됐다.

어머니는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에서 헤어졌던 여동생을 만났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 이모를 위로해서 대중에게 따뜻한 인상을 남겼다. 아들은 아마 평생 어머니에게 제일 효도했던 것이 이때 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현직 대통령이 모친상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들은 다행히 편안한 얼굴로 마지막 떠나시는 모습을 가족들이 지킬 수 있었다. 평생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셨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고생도 하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셨다. 어머니는 41년 전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신 후 오랜 세월 신앙 속에서 자식들만 바라보며 사셨는데, 때때로 기쁨과 영광을 드렸을진 몰라도 불효가 훨씬 많았다. 특히 아들이 정치의 길로 들어선 후로는 평온하지 않은 정치의 한복판에 아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며 마지막까지 가슴을 졸이셨을 것이다. 마지막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이제 당신이 믿으신 대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할 뿐이다.
어머니는 본당인 부산교구 신선 성당에서 레지오 단장, 구역장, 사목협의회 부회장, 신협 이사 등으로 봉사했다.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아들을 통해 늘 어머니의 몫까지 대신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묵주 반지를 선물받고 아들은 늘 네번째 손가락에 이를 끼고 다녔다. 바빠 성당을 잘 찾지 못하는 아들을 걱정해 어머니의 선물이다. 아들 왼쪽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이 묵주 반지는 종교 이전에 어머니이다. 심장과 가장 가깝다는 네번째 손가락의 묵주반지가 사람에 대한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가슴을 이끈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몸에 배인 어른에 대한 공경. 그 시작은 어머니이시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 여사가 어제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부산의 병원을 찾아 마지막을 함께 했고, 고인의 뜻에 따라 빈소는 부산 남천성당에 마련됐고, 장례는 가족들과 차분하게 치를 예정이며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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