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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D May 07. 2016

한 폭의 그림 같은 야구장, PNC 파크

PNC Park, Pittsburgh, PA

미국에서 지내면서 현지인 친구들에게 가장 멋진 메이저리그 구장이 어디인지 물어보면 항상 꼽히는 야구장이 몇 개 있었다.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 샌프란시스코의 AT&T 파크 등이 언급되곤 했는데 여기까지는 워낙 유명한 구장들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이름 하나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곤 했는데 바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홈구장인 PNC 파크였다. 실제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유력 매체나 스포츠 전문 블로그에서 발표하는 메이저리그의 가장 아름다운 야구장 순위에서 PNC 파크가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1위로 꼽는 매체도 상당 수였다. 구장의 전경 사진을 보니 야구장 뒤로 피츠버그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멋지게 펼쳐져 있는 것이 제법 멋져 보였다.


이런 칭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2013년 8월에 학업 차 미국에 가서 제일 처음으로 본격 장거리 야구장 여행을 떠난 곳이 바로 피츠버그였다. 뉴욕에서 출발하는 야간버스를 타고 장장 여덟 시간을 이동하여 피츠버그 시내에 아침 7시에 도착했다. 야구장 여행을 하면서 이동 경비와 숙박비를 한꺼번에 퉁칠 수 있는 저가 야간버스를 많이 이용했다. 사실 좌석 한 두 칸에 몸을 구겨넣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청해야 하기 때문에 '숙박'이라 표현하기도 뭐하다. 나중에 가서는 야간버스 한 번 타면 그 다음 날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쑤셨지만, 피츠버그 행은 처음이라 그런지 컨디션이 썩 나쁘지 않았다. 대신 저녁 시간에 있는 야구 경기 관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계획 없이 간 탓에 오전 내내 할 게 없었다. 근처 인터넷이 되는 카페에 가서 관광거리를 검색해봐도 마땅히 재미있어 보이는 게 없어서 그냥 다운타운 카페에서 시간을 쭉 보냈다.



피츠버그가 사랑한 선수, 로베르토 클레멘테


파이어리츠 응원 티셔츠를 팔고 있는 가판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간단히 숙소에 짐을 풀고 야구장을 향해 나섰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아니면 당시 파이어리츠가 한창 잘 나갈 때라 그런지, 경기 시작 한참 전임에도 불구하고 다운타운에 피츠버그 저지를 입은 팬들이 많았다. 그들의 행렬을 따라 6번 가로 들어서니 거리 곳곳에 벌써부터 파이어리츠 티셔츠를 판매하는 가판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해적선장, 해골 문양을 소재로 한 재미있는 티셔츠들이 많이 보였다. 특히 파이어리츠 구단의 상징색이 검은색과 노란색이다 보니 더욱 눈에 확 들어왔다. 이 검은색과 노란색 조합은 피츠버그 시의 깃발 색에서 따온 것이다. 오래 전 파이어리츠 유니폼은 전형적인 흰색 바탕의 빨간색, 파란색의 조합이었으나 1948년에 시의 깃발 색깔에 착안하여 지금의 색 조합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피츠버그를 연고로 한 미식축구 팀 스틸러스나 아이스하키 팀 펭귄스도 비슷한 계열의 색깔을 유니폼 색깔로 채택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팀을 보유한 도시 중에 프로스포츠 팀 전체의 상징색이 통일된 도시는 아마도 피츠버그 밖에 없을 것이다.


6번 가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교통이 통제된 노란색 철제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저 건너 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PNC 파크를 향해 팬들이 걸어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아침에 피츠버그 도착했을 때 버스 창 밖으로 얼핏 봤을 때만 해도 무슨 다리가 촌스럽게 노란색인가 싶었는데, 비슷한 색깔의 유니폼과 모자를 입은 팬들의 행렬과 어우러지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생각해보니 박찬호 선수나 류현진 선수의 피츠버그 원정 등판 경기를 볼 때 경기장 뒤로 보였던 노란색 다리가 바로 이 다리였다. 이 다리의 이름은 파이어리츠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츠버그 선수의 이름을 딴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 (Roberto Clemente Bridge)’이다. 다리를 지나면 바로 왼쪽으로 PNC 파크 외야 게이트 앞에 클레멘테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PNC 파크와 피츠버그 다운타운 사이로 오하이오 강의 본류인 앨레게니 강이 흐르는데 야구장 가까이에 똑같이 생긴 노란색 다리 세 개가 나란히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다리들은 저마다 피츠버그 출신 유명 인사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여졌다. 야구장에서 가장 먼 쪽에 위치한 다리는 피츠버그 출신의 환경운동가이자 “침묵의 봄”의 저자로 유명한 레이첼 칼슨의 이름을 땄고, 중간에 있는 다리는 저명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사실 피츠버그에 오기 전까지 앤디 워홀이 피츠버그 출신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야구장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위치한 것이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이다. 원래 이 다리의 이름은 ‘6번 가 브릿지’였다. 1999년 구장 신축 공사에 앞서 당시 파이어리츠 팬들은 새로운 야구장의 이름이 그들이 사랑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PNC 금융그룹이 구장 명칭 사용권을 따내는 바람에 구장 이름에 클레멘테의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경기장에 붙어 있는 6번 가 브릿지의 이름이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로 명명되는 것으로 팬들은 위안을 삼았다. 파이어리츠 프랜차이즈 스타인 앤드류 맥커친 다음으로 지금도 그의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많이 입을 정도로 클레멘테는 아직까지 피츠버그 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를 건너는 팬들의 행렬. 중간 중간에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카디널스 원정 팬들이 거슬린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클레멘테 동상


로베르토 클레멘테라는 선수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그는 파이어리츠 소속으로만 1955년부터 메이저리그 18년 선수 생활을 하면서 MVP 1회, 타격왕 4회, 올스타 12회, 통산 3,000안타에 빛나는 업적을 달성한 선수이다. 다재다능한 선수였지만 그의 최고 장기는 뛰어난 수비였다. 2007년 팬들이 직접 뽑은 역대 최고 수비수로 구성된 골드글러브 팀에 클레멘테는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제치고 3명의외야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뛰어난 야구 실력과 함께 남다른 봉사 정신을 가졌던 선수로 더욱 유명하다. 클레멘테는 매년 시즌이 끝나면 고향인 푸에르토리코와 주변 국가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봉사 활동을 주도했다. 1972년 마지막 날에도 그는 지진 피해를 입은 니카라과로 직접 구호 물자를 싣고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비행기 사고가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의 헌신적 봉사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듬 해부터 지역사회활동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선수를 선정해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에 대한 존경은 쿠퍼스타운에 있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찾아볼 수 있다. 명예의 전당 건물 한 가운데에 있는 세 명의 야구 선수 동상이 서 있는데, 루 게릭, 재키 로빈슨, 그리고 한 명이 바로 클레멘테이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야구장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클레멘테 박물관이 있다. 오전에 여기를 가봤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파이어리츠 팬 인게이지먼트


경기 시작 전 밖에서 흥을 돋우는 팬들의 모습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사이 어느새 다리를 건너 PNC 파크에 다다랐다. 경기 시작까지는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주변은 벌써 잔치 분위기였다. 경기장 옆을 따라 나 있는 페데럴 스트리트는 차량 통행이 통제되어 있었고 대신 검은색과 노란색의 파이어리츠 티셔츠를 입은 팬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저마다 캔맥주나 병맥주 하나씩을 손에 들고 삼삼오오 모여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거리에 줄지어 있는 레스토랑과 스포츠 펍도 이미 반쯤 취한 손님들도 북적댔고, 가게들 틈 사이에서 거리 공연을 하는 밴드도 보였다. 불과 10분 전만 해도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심이었지만 다리 하나 건넜더니 자유로움 가득한 다른 세상이었다. PNC 파크가 다운타운에 인접해 있어 테일게이트 파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보니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식전 음주행사를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면서 클레멘테 외에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야구 역사를 상징하는 선수들의 동상들을 볼 수 있었다. 좌측 외야 게이트 앞에는 1970년대 내셔널리그를 주름 잡았던 강타자 윌리 스타젤의 타격 모습이, 우측 외야 게이트 앞에는 월드시리즈 역사상 유일한 7차전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인 빌 마제로스키가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PNC 파크 홈플레이트 게이트 정면에는 호너스 와그너의 동상이 서 있었다. 요즘 팬들은 호너스 와그너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지만, 와그너는 1800년대부터 활약한 메이저리그 제 1대 타격 기계에 해당하는 전설적인 선수이다. 1936년 시행된 최초의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다섯 명의 선수가 헌액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와그너였다. 당시 와그너의 득표율이 같은 해 헌액된 베이브 루스와 똑같이 95.1%였다고 하니 그의 명성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PNC 파크 전면에 위치한 호너스 와그너 동상. 딱 봐도 옛날 사람 유니폼이다.


윌리 스타젤 동상이 서 있는 좌측 외야 게이트에서 코너를 도니 또 다른 작은 게이트 하나를 발견했다. 이 곳으로 들어가니 스타젤 동상 외에 또다른 일곱 개의 실물 크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하이마크 레거시 스퀘어 (Highmark Legacy Square)’라고 불리는 이 곳은 과거 피츠버그 소재 니그로리그 팀의 유산과 그 팀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재키 로빈슨이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기 전까지 흑인 야구선수들은 별도의 리그인 니그로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한 때 니그로리그는 메이저리그만큼이나 인기가 많아 웬만한 대도시에 니그로리그 팀이 하나씩은 꼭 있을 정도였다. 당시 피츠버그 주변에도 피츠버그 크로포츠라는 팀과 인근의 홈스테드 그레이스라는 팀이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일곱 개의 동상은 모두 이 두 팀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선수들의 동상으로, 나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사첼 페이지와 조쉬 깁슨과 같은 선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동상 옆에는 저마다 선수들의 기록과 당시 자료를 소개하는 스크린이 있었는데, 조쉬 깁슨이라는 선수는 통산 홈런이 800개는 넘는 어마어마한 슬러거였다고 한다. 동상까지 미처 제작하지 못한 니그로리그 선수들을 위해서는 그들의 이름을 새긴 대형 배트를 스퀘어 위에 설치하여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었다. 여러 구장을 다녀 봤지만 니그로리그의 선수들만을 위한 별도의 기념 공간이 마련된 곳은 아마도 PNC 파크가 유일했던 것 같다.


경기장 내부 복도로 들어서자 구단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담은 사진이 간단한 설명과 함께 천장에 걸려 있었다. 클레멘테 동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피츠버그 야구 역사의 유산들을 접하면서 새삼 파이어리츠가 전통 깊은 야구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이어리츠가 근래 이십 년 가까이 부진한 성적을 낸 탓인지 나도 모르게 얕잡아 봤던 모양이다. 사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는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구단이다. 파이어리츠는 현존하는 서른 개 메이저리그 팀 중, 1800년대에 창단하여 비록 구단 명칭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연고지 이전 없이 같은 도시에서 명맥을 이어 온 몇 안 되는 팀 중 하나이다. 또한 피츠버그는 메이저리그가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의 체제를 갖춘 후 개최한 첫 월드시리즈인 1903년 월드시리즈에 내셔널리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었다.


이 모든 사실을 내가 PNC 파크 방문을 계기로 알게 되었으니, 비록 내가 열혈 파이어리츠 팬까지는 되지는 않았지만, 피츠버그 구단 입장에서는 ‘팬 인게이지먼트(Fan Engagement)’에 성공한 셈이다. 팬 인게이지먼트는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미국 프로스포츠 모든 구단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영역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팬 관여’ 정도가 되겠지만 훨씬 더 적극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경기 현장 관람, 중계 방송, 기념 상품에서부터 소셜 미디어, 자선 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구단이 생산해내는 모든 분야에 걸친 콘텐츠에 대해 팬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높은 구매 의향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말한다. 이러한 팬 인게이지먼트 수준을 높이기 위해 메이저리그 구단은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팬 엔터테인먼트(Fan Entertainment)’ 전략이다. 이닝과 이닝 사이에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깨알 같이 진행되는 수많은 이벤트, 인터넷에 퍼뜨리는 재미있는 비디오 클립, 그리고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와 짜릿한 승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팬들에 대해 구단과 선수에 대해 끊임없이 더 많이 알게 하는 ‘팬 에듀케이션(Fan Education)’ 전략이다. 야구라는 경기가 규칙에 대해 많이 알수록 보는 재미가 있는 것처럼 구단과 선수에 대해 속속들이 알수록 경기를 즐기는 맛이 더해진다. 선수들의 정보가 알차게 들어 있는 프로그램 책자, 구단의 역사와 전설적 선수를 기리는 동상과 조형물, 기념품 등이 이 전략의 세부 전술들이다. 피츠버그 구단이 탁월했던 것이 바로 이 전략이다.


PNC 파크 방문 전까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하면 노란색 ‘P’ 심볼만 떠올렸던 나였다. 하지만 앞으로 메이저리그 경기 중계를 보면서 PNC 파크 뒤로 보이는 노란 다리를 보면서 피츠버그의 영웅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년 월드시리즈 경기를 보면서 유일한 7차전 끝내기 홈런 승리 팀은 피츠버그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파이어리츠 구단에 대한 나의 관여 수준이, 인게이지먼트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PNC 파크에서 경기를 채 보기도 전에, 심지어 그라운드를 보기도 전에도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야구장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좌측 외야 고층 구조물 로턴다(rotunda)에 나란히 서서 경기를 관전하는 팬들


경기장 내부를 한 바퀴 쭉 돌아보니 PNC 파크에서 인상적인 경관들은 외야 쪽에 몰려 있었다. 특히 외야 관중석 뒷편으로 조성된 널찍한 공간에서는 편하게 핫도그를 먹으면서 야구장 바로 옆을 흘러가는 앨레게니 강과 그 뒤로 이어진 도심 속 스카이라인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며칠 전 비가 온 탓인지 아니면 원래 강물 색깔이 그런 것인지, 강물 색이 흙탕물 색깔에 가까워서 조금 아쉬웠지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강을 지나가는 배의 뱃고동 소리도 운치있게 들려왔다. 좌측 파울 폴대 뒤로는 4~5층 높이의 나선형 구조물 로턴다(rotunda)가 서 있었다. 원래는 이 곳을 통해 1층에서 내야 꼭대기 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각 층마다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라운드 쪽을 향해 지는 석양 빛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토요일 저녁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그라운드가 잘 내려다 보이기도 해서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자기 자리에 앉지 않고 여기에 서서 관전하는 관중들이 많았다.


피츠버그에 오기 전 어느 자리가 좋은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절대 비싼 돈 주고 아래층 좌석을 사지 말라는 글이 많았다. 물론 어느 자리에 앉아도 경기를 보기는 좋지만 PNC 파크의 경치를 한 눈에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위층 좌석에, 특히 홈플레이트 뒤쪽의 위층 좌석에 앉는 것이 좋다고들 했다. 조언대로 홈플레이트 뒤 위층 좌석으로 미리 예매를 해둔 좌석으로 향했다. 이미 자리로 가는 길에 그라운드의 모습이 얼핏 보였지만 얼마나 좋은 경치인지 딱 자리에 앉은 뒤 한 방에 실감하려고 일부러 눈길을 돌렸다. 경기가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내 자리에 이르러 야구장을 내려다 보자 말로만 듣던 ‘한 폭의 그림 같은’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석양 빛을 머금은 PNC 파크의 그림 같은 전경

정갈하게 잔디를 깎아놓은 그라운드를 둘러싸고 있는 관중석에는 피츠버그의 상징색 티셔츠를 입고 온 팬들이 검정색과 노란색 점들을 빼곡히 이루고 있었다. 경기장 너머로는 노란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가 황금빛 석양을 받아 아까보다 더욱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강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흙탕물로 보였던 앨레게니 강물도 석양 빛을 받아서인지 노란 기운을 감돌며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렸다. 백미는 강 뒤로 펼쳐진 피츠버그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었다. 아직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기 전이라 강 너머 고층 건물들이 붉은 빛이 감돌기 직전의 석양을 머금고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황금색 태양빛을 머금자 PNC 파크의 노란색 풍경이 황금 들녘만큼 아름다운 풍경으로 거듭났다. 마침 파이어리츠가 스스로 구단의 상징색을 표현할 때도 ‘Black and Yellow’가 아니라 ‘Black and Gold’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 모든 황금색 풍경과 함께 녹색 그라운드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왜 다들 최고의 경관을 가진 야구장으로 PNC 파크를 꼽는지 비로소 납득이 갔다.


나는 메이저리그 구장에 갈 경우 대개 주말 낮 경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경기는 한국 프로야구처럼 열광적인 응원 문화는 별로 없고, 대신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반바지 차림으고 햇볕 아래서 맥주를 마시면서 나른한 주말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뭔가 메이저리그 관람의 참맛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PNC 파크만큼은 저녁 경기에 갈 것을 강력히 권하고 싶다. 그래야 이 멋진 황금빛 경관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리도 내가 앉았던 홈플레이트 쪽의 위층 좌석을 추천한다. 스카이라인이 잘 보일 수 있게 약간 3루쪽으로 앉아도 좋지만 꼭 위층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해가 금방 져버리면 황금빛 풍결을 볼 수 있는 좋은 타이밍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경기장에 입장하길 강권하고 싶다.



남다른 위력의 해적 응원단


내가 본 경기는 세인트루이스와의 홈 3연전 중 2차전 경기로 마침 피츠버그와 세인트루이스가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피츠버그가 오랜만에 지구 선두싸움을 하던 때라 경기장 분위기가 아주 후끈했다. 다른 메이저리그 구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대형 깃발을 흔들어 가면서 열렬히 응원하는 팬들도 보였다. 해골 문양이 그려진 시커먼 '졸리 로저(Jolly Roger)' 깃발을 펄럭여대는 모습이 가열찬 응원이 흔치 않은 미국 다른 지역 팬이 보기에는 약간 무서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PNC 파크의 무서운 응원은 그 해 홈에서 치러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당시 상대 선발투수인 신시내티의 자니 쿠에토가 관중들의 위압적인 함성 탓인지 마운드에서 공을 떨어뜨렸는데, 바로 다음 투구에서 홈런을 허용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38,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PNC 파크는 메이저리그 구장 치고는 아담한 규모이지만 그 응원의 위력만큼은 대단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옆에는 세인트루이스 팬이 앉았다. 나처럼 혼자 야구를 보러 온 아주머니 팬이셨다. 이번 주말 3연전 내리 세인트루이스를 응원하기 위해 저 멀리 캘리포니아에서 피츠버그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분이었다. 볼 것 없는 피츠버그에 오로지 야구 세 경기를 보기 위해 왔다니 대단한 골수 팬이심이 분명했다. 아주머니는 피츠버그 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 선수들을 응원했다. 혼자 경기를 보러 온 사람 둘이 붙어 있다 보니 적적해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그 모습이 일행처럼 보였는지 뒤에서 피츠버그 팬들이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주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피츠버그가 당시 포수였던 러셀 마틴의 홈런과 선발투수 A.J. 버넷의 호투에 힘입어 완승을 거뒀다.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불꽃놀이


PNC 파크의 먹거리 중에는 ‘프리만티 브라더스(Primanti Bros.)’라는 가게에서 팔던 ‘피츠버거(The Pitts-burger)’라는 이름의 샌드위치가 기억에 남는다. 1930년대 프리만티 가문 형제들이 피츠버그 시내에 1호점을 낸 것으로 시작해 야구장까지 입점하게 된 이 가게의 샌드위치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보통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사면 함께 나오는 감자튀김과 코울슬로가 따로 있지 않고 빵 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새벽같이 일을 시작하는 트럭 기사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그들이 후다닥 먹고 일하러 갈 수 있게 모든 것들을 빵 사이에 때려 넣어서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빵 사이에 들은 게 많다 보니 먹다 보면 내용물이 줄줄 새 나오기 일쑤였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단할 것도 없는 맛이었다. 사실 미국에서는 샌드위치를 조금씩 변형해서 다양한 이름의 메뉴로 팔지만 한국 사람인 내가 느끼기에는 결국 거기서 거기인 샌드위치이다. 아마 미국인도 한국에 와서 갈비탕이든 설렁탕이든 꼬리곰탕이든 결국에는 비슷한 소고기 스프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래도 지역 고유의 브랜드를 야구장에 입점시킨 점은 인상적이었다. 요즘 들어 한국 야구장들도 저마다 특색 있는 먹거리를 개발하여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가 지고 나서도 도심 고층 빌딩의 불빛과 어우러진 PNC 파크의 전경은 멋졌다.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이렇게 잘 보이는 야구장도 드물다. 때마침 내가 간 날은 경기가 끝난 후 ‘써드 아이 블라인드(Third Eye Blind)’라는 유명 락밴드의 라이브 공연과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물론 경기장을 찾은 모든 관중들에게 이 모든 것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많은 구장의 다양한 불꽃놀이를 봐왔지만 개인적으로는 PNC 파크의 것이 최고였다. 라이브 밴드 공연과 함께 이뤄져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피츠버그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터지는 불꽃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실제로 내가 건너 온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릿지를 통제하고 다리에서 폭죽을 쏘아올리기도 하고, 시내 고층 건물 옥상에서 쏘아올리는 폭죽도 있었다. 대략 30분은 족히 밴드 공연과 불꽃놀이가 진행되었다. 한국시리즈 우승할 때 쓰는 폭죽의 스무 배는 넘게 썼을 것 같다. 옆 자리의 아이들은 신이 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피츠버그 야구 역사에 대해 배우면서 파이어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면, 자리에 앉는 순간 이후부터는 쭉 PNC 파크의 경관에 완전히 매료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팬 인게이지먼트’ 원투펀지 전략의 완벽한 승리였다.

경기 종료 후 라이브 공연과 환상적인 불꽃놀이. 3년 전 느꼈던 감동이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다 전해지지는 못하는 듯하다.


파이어리츠는 1993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20년 동안 5할 승률 달성에 실패한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미국 프로스포츠 종목을 막론하고 최장기간 기록이다. 성적이 부진하니 관중들도 한동안 PNC 파크를 외면했었다. 2000년대 한 때는 피츠버그의 홈 경기 평균 관중이 매년 메이저리그 팀 중 최하위 5위권 안에 포함되기도 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야구장에 팬들이 등을 돌렸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파이어리츠가 최근 몇 해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면서 피츠버그 야구는 다시 한 번 부흥기를 맞고 있다. 앤드류 맥커친이라는 새로운 프랜차이즈 스타도 등장했다. 그래서 야구장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이렇게 한창 좋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요즘, 꼭 한 번 PNC 파크에서 가서 직접 경기도 보고 주변 경관과 경기장 분위기도 즐길 것을 권하고 싶다. 피츠버그가 스몰 마켓 팀이다 보니 언제 또 성적이 곤두박질쳐서 관중이 확 줄어들지 모른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야구장이라도 관중석이 텅 비게 되면 흥도 덜 나는 법이다. 지금이 피츠버그 야구와 PNC 파크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에서 가려면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그만큼 발품을 팔아서라도 가보면 결코 후회 하지 않는 곳이 바로 PNC 파크이다. 더욱이 한국에서 진출한 강정호 선수도 점점 파이어리츠 스타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니 반드시 직접 가서 봐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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