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거나 행한 차별 억압 멸시 편견을 보는 거울
뉴스 안 보고 살았던 시절이 있다.
내가 사는 개인적 삶과 환경에서 벌어졌던 그 고달픔이 외부 세상의 것을 압도할 때였다.
하지만 이제 그 구분법을 탈피했다. 우리 내부와 외부를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있었다. 우리의 생각과 정신은 외부로 나타나는 온갖 물질 소요와 모두 이어져 있다. 안이 밖에 되고 또 밖이 안이 될 수 있다. 결국 내 안의 전쟁과 외부의 전쟁 역시 그러하다. 그 말은 내 안의 이해, 평화와 사랑이 외부의 안녕과 같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차별, 억압, 멸시, 편견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알레고리인 ‘파란 피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재일은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기에 피부색뿐 아니라 다문화 가정이 겪는 어려움도 함께 경험한다. 또한 미국으로 이민 가서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피부색에 대한 차별과 포개어지며 디아스포라로서의 고충은 배가된다.
소설은 소년의 시점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비슷하게 경험했을 많은 차별과 편견의 눈초리 앞에 우리를 함께 서있게 만든다. 사춘기를 지나는 유약하고 상처받기 쉬웠던 소년은 그나마 자신을 정서적 혹은 물리적으로 지지해 주던 주변인들을 하나 둘 잃는다. 하지만 소년은 내면적으로 성장한다.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혼란스럽고 안정과 사랑과 지지는 너무 멀게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재일의 이름은 영어로 ‘jail’ 감옥이라고 들릴 수 있다. 한국보다 다양성이 보장될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갖고 떠난 미국행 비행기에서 재일은 한국땅을 탈출하는 것 같으면서도 추방당한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재일은 그 미국땅에서 5년을 살다가 또다시 떠나 베트남으로 향한다. 그렇게 재일은 계속 탈출하고 또 탈출한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보면 여러 번의 큰 상실 후 재일은 슬픔의 내적 승화와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캔 삼촌이 권유했던 바 대로 소년은 더 큰 세계로 뻗어간다.
디아스포라라는 말 자체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떠난 유대민족을 지칭하던 명사였고 그들이 당한 박해의 역사는 오래되어 이제는 뿌리를 떠나 살아가는 이민자. 입양인 등 모두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추방되거나 탈출했던 이들은 다시 땅을 되찾고 또 그 땅에 살던 자들은 난민이 되고 포화 속에 산다. 서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계속 남기는 그 전쟁은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모두가 피해자일 수 있으며 동시에 가해자이다. 소설은 이 사실을 보게 한다. 내가 보내는 편견의 시선 하나가 누군가에게 가닿으면 그것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터넷상에서도 남녀, 세대, 학력, 성별, 성정체성, 정치성향 모두 편 가르고 이성과 지성을 상실한 채 싸운다. 나만 옳다고 말하며 폭발하는 혐오의 표현들. 그것들은 또 입으로 전달되어 거리로 퍼진다.
결국 우리 각자가 깨어있는 생각과 씻은 눈으로 세상의 혼동 속에서 ‘인간됨’을 고민하고 ‘인간성의 정수’를 찾아야 인류가 당면한 위기를 같이 극복할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난 이상 행복과 사랑을 갈구한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란 피부 재일의 삶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소외되고 차별받고 핍박받는 이들의 총체를 그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준다. 나라는 개인의 확장이 일류일 텐데. 우리가 전인류적 관점에서 세상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같이 생존하고 번영하고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재일의 문제 더 넘어 세상모든 타인의 고통을 직면할 때 동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돕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었다.
“생각해 봐요. 언젠가 피부색만으로 무지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라는 문장은 작가의 말에서 종적 연대가 아닌 횡적 연대로 집단에 저항하는 집단과 구조를 전복하는 구조의 희망을 볼 수 있는 세계를 꿈꾸게 했다.
승민의 수상 소식은 회사를 관두고 몇 개월 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 조용히 회복과 안정의 시간을 가지던 중 알았다. TV도 안 켜고 인터넷의 신문조차 안 보고 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심히 켠 구글에서 한겨레 신문 뉴스를 통해 알았는데. 뭔가 내 안에서 살아난 기분. 가슴이 뜨거워졌다.
꿈을 함께 이야기하고 눈물과 상처를 함께 했던. 고맙고 조금 미워도 했지만 미안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친구. 네 일은 분명 내 일보다 더 기뻤다. 그 느낌이 날 일으킨 힘. 기도할게 더 높이 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