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시의 갤러리 같은 편집 매장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
저마다의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수많은 관점들이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좋은 디자인이란 '까비, 내가 했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도록 하는 얄미운 존재들이다.
언젠가부터 '주제에 따라 책과 소품을 판매하며 공연,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아쉽지만 이미 나의 상상 속 공간에 근접한 장소가 있다. 바로 뉴욕 챌시 마켓 근처에 위치한 '잡지와 같은 관점으로, 갤러리같이 바뀌며, 가게처럼 파는'이라는 근사한 콘셉트를 가진 STORY라는 편집 매장이다.
STORY에서는 6주에서 8주 마다 Her, Good, Love, Design 등등의 테마에 따라 주제에 맞는 제품들을 선정하여 소개한다. '판매'라는 단어 보다는 '전시'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 해서 이 땅 값 비싼 지역에서 어떻게 렌트비를 감당할까 싶지만, 가게에서 잠깐 구경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이것 저것 사가는 것을 보니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닌 듯 하다. 세종문화회관에서도 전시한 적 있는 디자인계의 락스타 Sagmeister&Walsh 에서 브랜딩을 진행했는데 'ST[ ]RY' 의 괄호 안에 그 달의 콘셉트를 집어넣는 식이다. 그 때의 콘셉트에 맞게 천장부터 바닥까지 디자인이 바뀌어서 테마가 바뀔 때마다 구경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2년 전 대학원 진학을 위해 낯선 뉴욕에 도착한 첫 날, 숙소 근처였던 챌시를 돌아다니다가 갤러리인 줄 알고 무심결에 들어가서 신기하게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바로 그 장소에서 톰즈(TOMS) 창업자인 블레이크, 굳매거진(Good Magazine)의 창업자 벤, 그리고 스토리(STORY) 창업자 레이첼 앞에서 내가 만든 관찰 노트인 '경험일기(Experience Journal)'를 갖고 피치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맨 정신에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인데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면, '기업가 정신과 디자인'이라는 수업에서 짖꿏게도 '1000달러 벌어오기', '모르는 사람에게 이메일 보내 약속잡기', '초청되어 강연하기' 등의 10가지 불편한 과제를 내어주었고 다 하지 못하면 방학 때라도 마저 해야 한다는 엄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때마침 킥스타터를 통해 펀딩을 받았던 'Experience Journal'이 디자인 매거진들에 소개되어 미지의 사람들에게 종종 연락이 왔는데, 트위터를 통해 누군가가 이 장소에서 바로 다음날 열리는 'Story Pitch Night'에 참여해봐!'라는 멘션을 주었고 방학때마저 과제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급하게 지원해서 참가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창 '관찰의 힘'의 저자로 유명한 얀 칩체이스의 리서치 어시스턴트로 바짝 긴장하며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근무 시간 중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했던 것이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다음 스케줄을 위해 사장님을 두어 시간 동안 현장에서 서서 기다리게 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이 일을 통해 결론적으로는 얀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정말 두렵고 무서운 순간이었다. 이 긴장되는 모든 시간을 함께 하며 응원해준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귀여운 흑인 초등학생은 직접 만든 쿠키를 들고 나왔고, 내 앞 순서였던 브루클린에서 온 아주머니는 문구가 거꾸로 프린트되어 셀카를 찍으면 제대로 읽히는 가방을 만들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수업시간 나의 일일 멘토였던 크리스티나도 핸드폰과 연동되는 주얼리인 RINGLY를 선보였다. 쟁쟁한 참가자들 사이에서 긴장한 상태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중얼거리던 중, 내 차례가 와서 주섬주섬 나의 노트를 내밀고 '안녕하세요, Experiece Journal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준비했던 말은 거의 하지도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어느덧 일 년이 지나 그 장소에서 오늘부터 경험일기(Experience Journal)가 팔리게 되었다.
이번의 STORY의 주제는 'Creativity'로 창의적인 일을 하는데 쓰이는 도구들, 그리고 독특한 CMF(Color, Material, Finishing)들을 소개한다. 일 년 전의 서툴고 어눌했던 나를 기억하고 연락해주고, 또 나의 노트를 좋아해 주는 스토리 팀이 참 고맙다. 동경하던 공간에서 내가 만든 작은 노트가 팔린다니 꿈만 같다. 물론 그 과정이 평탄하기만 하지는 않지만 주어진 작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좋은 일도 있는 것 같다.
이 다음에 정말로 내가 꿈을 꾸는 공간을 만들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며 추억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꿈꿔보며 STORY에서 경험일기가 팔리게 된 소소한 이야기를 마친다.
공간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고, 그런 소담한 경험들을 오감을 통해 관찰하며 기록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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