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작은 새는 동굴 속에서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합니다. 폭풍우가 치는 동안에는 언제 그칠지 몰라 불행하죠.
하지만 독수리는 폭풍우가 칠 때 상승 기류를 타고 구름 위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럼 독수리는 평온한 하늘을 날며 폭풍우에 영향을 받지 않죠. 독수리는 폭풍우가 치는 동안에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몇 년 만에, 어쩌다 보니, 엄마를 따라 교회 예배석에 앉아있었다. 예배 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순간,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설교 소리는 이명처럼 멀어져 갔다. 꽉 찬 예배석에서 시간이 멈춘 듯 우두커니 나 혼자가 되었다.
독수리가 될 수 없는, 동굴 속 작은 새는 쏟아지는 빗줄기와 차가운 바람을 그저 힘 없이 바라보고 있다.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그 축축하고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칭칭 감아대지만 견뎌낼 수밖에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작은 새가 폭풍우를 그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동굴 안에서 기다리는 것밖에는.
작은 새는 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약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폭풍우가 잦아들길 바라왔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바위틈에 숨어 바람에 휘날려가지 않게 몸을 단단히 웅크리고 있는다. 빗줄기와 바람이 잠시나마 잦아들면 어둡고 습한 동굴 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뒷일을 생각지도 못한 채 무작정 밖으로 날아간다. 빗줄기가 곧 크게 들이닥칠 줄도 모른 채.
또다시 나타난 거센 비바람에 휘말린다. 간신히 옆에 있는 바위에 찰싹 붙는다. 다행히도 동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심조심 온몸의 힘을 모아 동굴로 다시 들어온다. 목숨은 건졌다는 안도감에 차디찬 바위 위에 누워 젖은 깃털을 마르길 기다린다. 그리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힌 것만 같은 이 기분을 견뎌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에 바위가 더욱 차갑게만 느껴진다. 축축한 습기 때문에 깃털은 쉽사리 마르지 않고, 이내 작은 새는 으슬으슬 몸을 떨기 시작한다. 더 기다릴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씩 작아진다.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작은 새의 몸과 마음은 병들어간다.
병원 진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이유 없이 피곤해지며, 몸을 씻기조차 힘들다. 지구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갈 듯이 바닥에서 몸을 뗄 수조차 없을 때도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된 지도 어느덧 일 년이다. 마치 위성처럼 나를 감도는 이 무기력과 작별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난 작은 새다.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그것도 열심히 기다린다.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폭풍우를 그치게 하거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동굴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정해진 날짜에 병원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이 주에 한 번 상담사를 만난다. 상담을 하는 동안 진짜 나를 마주해 보려고 가감 없이 치료에 참여한다. 맑은 하늘을 다시 보길 바라며 부단히 움직인다.
간절함이 부족했던 탓일까. 열두 알의 약은 그대로다. 이제는 과연 동굴 밖으로 나갈 날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지, 동굴 밖으로 나갈 다른 방법이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에 휩싸인다. 의문은 자책과 비난을 낳고 결국엔 체념에 이른다. 폭풍우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다. 언젠가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유유히 날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 자체를 사치로 만든다. 그 사치가 또 나를 다시금 작아지게 만든다.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조건이 붙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녀 취업이 안 되고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데, 몸이 아픈데, 정말 행복하십니까?"
이어지는 설교. 작은 새인 나에게 또다시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지금 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서도 저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진짜 나의 감정과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나의 몸은 비록 작은 새라고 할지라도, 나의 마음은 독수리처럼 의연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감히 그날을 바라도 되는 걸까.
딸이 처음으로 도화지에 가족을 그리거나, 서툴지만 어른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들고 먹거나, 팝콘을 사달라며 두 손을 맞잡고 몸을 배배 꼬며 애교를 부릴 때 그 어린아이가 나를 웃음 짓게 한다. 이 웃음이 행복의 한 형태라면, 난 행복을 경험한 것이겠지. 아마도 그런 거겠지.
그런데 난 왜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일까. 딸의 애교 없이도, 나 스스로에게 '행복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만족할 만한 삶'이라고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바라본다.
작은 새여도, 작은 새여서 행복해질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