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는 촉촉하게 내리고 오늘 아침 공원으로 운동 가기는 틀렸구나 싶었다. 비가 소강상태일 때 가든가 낮에 워킹머신을 타야 될지도 모르겠다. 밤새 공부하고 새벽에 자는 아이를 보니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하기는 미안한 일. 모닝 걷기 루틴이 만든 아침 일찍 일어난 김에 이웃님들의 감사한 댓글에 답글을 달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매일 아침 써 봤니?> 김민식 님의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아침 일찍 글 쓰는 기분은 어떨까 싶었다. 한동안 모닝 루틴으로 아침 일기를 써 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좀 시들해졌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운동화 신고 나가기 바쁘니... 길게 글을 써 보기는 어려웠었다. 덕분에 오래전 학창 시절로 추억여행을 해 본다.
약간 서늘한 공기에 카키색 면 스웨터를 꺼내 걸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들어보니 편안한 느낌이 온몸에 퍼진다. 애정 하는 거실 좌식 탁자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보니 뭔가 슥슥 글이 써진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런 맛으로 매일 아침 글을 쓰는 거구나."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다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뿌듯하든지! 학창 시절 일찍 일어나면 숙제도 공부도 다 끝내 놓고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까지 천천히 한 그릇 잘 먹어주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서는 완벽한 하루가 시작된다.
머리를 덜 말리고 와서 샴푸 냄새를 날리며 손가락으로 옆머리 말기에 집중하는 친구, 숨을 헐떡거리며 담임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던 친구, 숙제 다 했냐며 얼른 공책 빌려달라고 간청하는 친구, 뒤에서 쿡쿡 찔러서 보면 오늘 미술 준비물 뭐냐고 물어보는 친구 등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잠시 졸고 있는 동안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침 자습 시간은 오늘 수업이 시작되기 전 꼭 필요한 시간이었지 아마. 그 시간은 오늘 하루 학교생활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던 듯하다. 나 역시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꼭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그 와중에도 아침을 못 먹고 온 친구는 배가 고파 죽겠다며 쉬는 시간에 매점 식당에 가서 뭐 먹고 오지 않겠냐고 급제 안을 하기도 한다.
매점이라~~ 아! 여학교 매점은 우리의 영롱한 추억에 깊이 자리한 보물상자 같은 곳이다. 내가 졸업한 대구의 W여고는 라면과 김밥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자리가 꽤 널찍해서 요즘 작은 학교의 급식당 정도는 되었던 듯하다. 라면과 김밥을 주문하면 이모들이 얼마나 빨리 라면을 끓여 주는지~~
점심시간에 줄 선 아이들이 꽤 많지만 잠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불꼬불한 달걀과 파송송 띄운 라면과 윤기가 흐르는 김밥 두 줄을 받아 들고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그때 꼬들꼬들한 라면은 얼마나 맛이 있든지... 김밥 속에 햄, 단무지, 오이, 당근, 어묵 정도 들어갔던가? 아주 꽉 찬 속은 아니었어도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딱 이런 비주얼. 아무리 용을 써도 그 때 그 맛을 따라갈 수가 없더라!
지금은 왜 정성을 바쳐도 그 맛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빈 위장 속에 얼큰한 국물이 들어가면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 아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라면은 각각 김밥은 하나 시켜서 둘이 같이 먹는 거였는데... 대충 개수를 생각하며 너 하나 나 하나 그렇게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김밥 속이 제일 많이 든 꼬다리 하나가 남으면 나보다 배 고픈 친구가 "이거 나 먹어도 돼?"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었지. "그럼" 예나 지금이나 음식 욕심이 과하지 않는 나는 양보를 잘하는 편이었던 듯.
우리는 도시락을 2개 싸 들고 학교에 다니던 세대였다. 아침부터 엄마는 각각 다른 반찬을 두 개의 도시락에 넣느라고 고생을 하셨는데 연년생인 오빠와 나의 도시락 4개를 싸기도 벅차셨을 듯. 그런데 사실은 하나만 싸 가고 한 끼는 매점 식당에서 라면을 먹는 게 더 행복했다. 매일 라면 사 먹을 돈을 엄마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었을 거다.
어떤 날은 허기를 못 참아 쉬는 시간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는데 그 타깃은 주로 나이 드신 마음 좋은 선생님이다! 지금도 작문 선생님이 생각난다. 내 머리는 가발이라고 일찌감치 커밍아웃하셔서 항상 선생님 얼굴 위에서 머리를 지우고 얼굴을 그려 보면서 킥킥 웃어대던 시간이었다. 4교시에는 참 배가 고팠다.
선생님이 필기를 하면 재빨리 책상 밑에서 도시락 뚜껑을 열고 한 입 털어 넣는다. 반찬까지 얼른 집어서 입안에 넣는데 눈부시게 빠른 동작이다. 선생님이 안 볼 때 씹는데~~ 간이 약한 나는 몇 번 삼키다가 그만두는데 기어이 밥 한 그릇 야무지게 다 먹는 친구도 있었다. 앞머리 길게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잘 모를 줄 알았으리라! 나중에 교탁 위에 서 보고 알았다. 뜻밖에도 교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못 본 척하는 거지. 못 볼 수가 없다.
고 2 겨울방학부터 야자타임에 들어갔는데 지금도 웃기는 건 밤에 불이 환해야 되니 전등부터 먼저 갈아 주었다는 것이다. 양 쪽 벽에 달린 선풍기도 잘 돌아가는지 점검을 했다. 고 3의 대입이 끝나면 그때부터 사립인 우리 학교는 바로 2학년들이 야간 자율학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단한 한밤중에 집에 가는 날이 계속되는 것이다.
"어유~~ 이제 우린 좋은 시절 다 갔어!"
슬픈 얼굴과는 달리 날마다 떼 공부를 하겠다고 가방 가득 참고서며 문제집을 가져오던 친구들. 마음만큼 진도가 나갔으면 정말 좋았겠지! 가을 문집 전의 추억, 왈츠 장단에 춤추던 강당과 반별 노래와 춤 경연은 2학년까지 간직하기로 하고~~**
매일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남아서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앞사람의 촘촘한 등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학습능률엔 최고였다. 열공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절로 불태우게 되는 듯. 시대에 앞서 가던 재단이 재래식을 수세식 화장실로 바꾸어 주어서 서서 거울 보고 양치질할 수 있는 세면대가 생겼다. 그 창 너머 빈 들판에 저녁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이렇게 공부해봤자 누구 엄마야. 대충 해"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애는 애다. 계절이 바뀌면 특히 봄이나 가을쯤에는 하루쯤 그 야자를 빠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아침부터 담임선생님만 보이면 아픈 척을 하느라고 수시로 엎드려 본다. 선생님이 보이면 괜히 창백한 척도 한다. 청소시간쯤 슬금슬금 가서 그날인데 너무 배가 아프다는 그런 하소연을 띄운다.
여학교여도 남선생님들이 많았던 시절이라서 한 두 번쯤은 이런 간청이 통했다. 다른 반에 있는 두어 명의 절친들과 이미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1차 접선장소는 교문 앞. 2차 접선 장소는 학교 앞 분식점이다. 숙제가 있든지 타이밍을 못 찾은 친구가 올 때까지 먼저 분식점에 가서 기다리기도 한다.
이럴 때 메뉴는 떡볶이와 튀김, 납작 만두이다. 빨간 떡볶이 국물을 얄팍하게 기름에 노릇노릇 구운 만두와 김밥 말이 튀김 위에 끼얹어 먹으면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마침 아이들도 하교하고 빈 분식점에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눈치 보지 않고 우리는 수다타임을 이어갔다. 야자 끝날 때까지 분식점에서 각자 밀린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이 하교할 무렵 늦은 대열에 끼어 마치 야자하고 귀가한 것처럼 버스를 탔다. 집에 가서 오늘도 수고했다는 엄마 말에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런 일탈 몇 번으로 그 긴 시간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가면 그 밤에 꼭 듣게 되는 음악방송은 FM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뮤직을 들으며 숙제를 하거나 문제집을 풀면서 듣는 별밤지기의 목소리는 참 달콤했다. 간간이 소개되는 사연들에 심취하고 오늘의 초대가수는 누구일까 궁금해하면서 감성이 돋으면 예쁜 편지지를 꺼내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보내는 손편지를 쓰기도 한다. 또박또박 최고의 정성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노래 가사를 옮기기도 했다.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면 공테잎에 노래를 녹음하느라 손이 바쁘다. 그 시절은 공테잎에 요즘 인기 있는 노래를 녹음해서 손글씨로 제목을 써 준 다음 선물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남자 친구에게 받은 음악 테이프를 자랑하기도~~ 그런 테이프 못 받아본 모태솔로들이 엄청 부러워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나는 학창 시절 사복도 입어 본 세대이지만 그래도 학창 시절만 생각하면 검은색 치마 정장이 떠오른다. 새하얀 칼라가 눈부신 딱 붙는 상의에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하얀 면양말 카바를 갖춰 신고, 감색 책가방을 들고 곱게 빗은 단발머리에 검정 핀으로 한쪽 머리를 단정하게 고정시킨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조금 떨어져서 두 손을 모아쥐고 가방을 들고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그 시절 여고생들의 조신한 포즈.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는 디자인이어서 슬림한 체격 아니면 플레어스커트와 소화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친구들은 자주 아침을 굶었다.
고개를 숙이면 찰랑거리는 왼쪽 옆머리가 쏟아지는 교복 입은 친구들의 옆모습도 참 고왔다. 여학생들만 있어서 더 편안했던 여고시절. 교실 안 어디서고 내 마음대로 포즈를 하고 친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에 귀가 즐거웠던 것 같다. "정말?" 이러면서 어디서나 대화에 끼면 수업종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우리가 너무 큰 소리로 떠든다고 한 번은 연세 드신 주임 선생님이 서울 갔더니 여학생들이 얘기하는 소리도 조용조용하더라고 기를 죽이셨는데. "서울 가시내들은 표준어를 써서 목소리도 작다는 건 말도 안된다. 글면 샘이 거기로 가시든가!" 무서운 샘이 나가시면 선생님 뒷통수에 대고 나직하게 사이다를 날리는 친구도 있기 마련. 세월이 흘러 내가 수도권에서 교사생활해보니 그건 다 거짓말! 목소리 크면 시끄러운 거지. 그렇지도 않았다.
그 시절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오면 얼마나 반갑던지. 그 시절 우리가 즐겨 서 있던 뒷자리 버스 좌석 쪽으로 가면 늘 또 다른 학생들 옆으로 가서 서게 된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남 녀 할 것 없이 다른 학생들의 가방을 잘 받아 준다. 그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가끔 버스에서 초등학교 남자 동창들을 만나도 괜히 모르는 척 내외하고~~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짓을 많이 했다.
버스 맨 뒷 좌석에서 졸다가 웬 이름도 모르는 남학생의 어깨에 고개가 닿은 것을 알면 어찌나 창피하든지. 그래도 자꾸만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며 졸음이 쏟아지던 야간 버스! 그저 집에 갈 때 뒷좌석 창가에 자리 하나만 비면 행복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버스 안 FM방송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
어쩌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인파에 밀려 앞으로 떠밀려 가면 내 가방을 받아 주는 핸섬한 남학생의 옆얼굴에 가슴 설레며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다음 이야기를 구상해 보던 꿈 많은 시절~~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소설 한 편 구상을 마쳤던 감성이 넘치던 시간이었지.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아침 돈 한 푼 안 드는 기억 저편 멀리 추억여행을 해 본다. 세월이 흘러도 그 시절 드물었던 신축생활관 강당 부속건물은 여전히교정에 남아있네. 랜선으로 오랫만에 모교를 탐방해 본다. 그 때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둘 걸! 고향 떠나고 결혼과 취업으로 연락도 못 하고 끊어져 버린 수십년! 이젠 객지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아졌다. 오늘 문득 그 때 그 시절 친구들 얼굴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