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 내집 마련기1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더니… 어떡하니.”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사촌언니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이 위로였는지, 예언이었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그저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으로 들렸고, 그래서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말이 내 가슴 어딘가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는 걸.
나는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내 삶이 엄마의 삶과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엄마는 늘 바빴다.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나는 그 자리를 채우듯
묵묵히 공부하고, 용돈을 모아 엄마께 드리고, 동생의 도시락을 챙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가끔 돌아오신 엄마는 밀린 빨래를 하고, 밤늦게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그게 엄마의 사랑 방식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연인은 달랐다.
학교에 찾아와 ‘아빠라고 불러라’며 소란을 피우던 사람, 나를 향한 불쾌한 시선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일들.
아직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 모든 걸 혼자 삼켰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너무 지쳐 있는 엄마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묵묵히 버티는 것.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아빠’라 부르고, 생활비 걱정하는 엄마에게 만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적금통장을 내밀며 “이거라도 보태요”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참는 게 일상이 되었고, 견디는 게 버릇이 되었다.
가난이란 게, 편모가정(그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이란 게 세상의 편견을 얼마나 끌어안고 사는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내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그 모든 감정이 터져 나왔다.
시댁 사람들은 단출하고 가난한 우리 가족을 향해
“너희들이 뭔데 끼어드냐”고 외쳤다.
만삭의 나를 데리고 가서는 임신 중절 얘기까지 꺼냈다.
그때, 내 안에 있던 오기가 불타올랐다.
“두고 봐. 돈 때문에 이런 서러움은 다시는 안 당한다.”
아빠를 만들어주지 못해도, 내 아이에게는 돈 때문에 무시당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건 내 생애 가장 간절한 결심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아기들을 업고 설문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녹취를 풀고, 식당 설거지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나는 종종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반월리에 있는 삼성전자, 그거 내가 지은 거야.”
스물두 살, 대학교 2학년 때 엄마와 함께 노가다판에 나갔으니까.
그때 지었던 건물이 바로 그곳이었다.
몸이 부서질 듯 힘들었지만, 그때 배운 건 하나였다.
**‘돈은 수단이 아니라, 나와 아이를 지키는 방패’**라는 것.
그렇게 일에 미치고 돈에 미쳐 살다 보니 가족들은 나를 비난했다.
“애 좀 신경 써라.”
“엄마가 돼서 밥도 제대로 안 해주냐.”
“너는 너만 생각하냐.”
엄마와 동생에게 매일 듣던 말이었다.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아이보다 일을 더 우선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1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다.
처음엔 60만 원이던 월급이 350만 원이 되었고, 내 손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쌓였던 울분이 조금은 녹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미안함이 남아있다. 아들에게 더 따뜻하게, 더 오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성격 좋고, 다정하고,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아이.
그걸 볼 때마다, 세상이 내게 주는 보상이 바로 이거구나 싶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똑같이 살았을 것이다.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간절했다.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우리 아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집은 내겐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증거이자, 세상이 내게 준 마지막 위로였다.
그 집 안에서 이제는 내 딸(혹은 아들)이 나를 닮되, 그저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가길 바란다.
그게 내가 살아온 이유고, 이제야 이해하게 된 ‘엄마의 팔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