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테크 일지2: 내가 금수저가 되지 뭐!

미혼모 내집마련기19

by 누드빼빼로

문득 오래전, 수지의 어느 작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곳은 규모가 작아서 전교생이 내 자식 같아 좋았지만, 사실 학교가 작다는 것은 그만큼 한 사람이 짊어져야 할 업무의 무게가 무겁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더 많이 움직여야만 학교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굴러갔고, 그 '누군가'의 역할은 대개 책임감이 앞서는 이들의 몫이었다. 내 업무만 하더라도 수업계,학적계, 문예, 토론, 방송업무, 도서관 담당 등 굵직한 업무와 교과부장, 도서부 동아리, 방송부 동아리 운영 등도 추가였다.


특히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학교의 시계는 평소보다 훨씬 급박하게 지나갔고 결국 퇴근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2개 학년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수차례 검토하며 오타 하나까지 잡아내는 일, 성적 처리와 각종 행정 업무가 겹치면 정시 퇴근은 애초에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밤 9시를 훌쩍 넘겨 퇴근하는 날이 일상처럼 반복되던 시기였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초과근무의 밤이었다. 학교 건물은 이미 정막에 휩싸였고 복도의 불은 절반쯤 꺼져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오직 교무실 안, 몇몇 선생님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만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프린터의 마찰음과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울 뿐이었다. 그 시간까지 남아 있는 얼굴들은 늘 비슷했다. 타고난 책임감이 강하거나, 도저히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같은 부서에서 함께 초과근무를 하던 사회 선생님과 잠시 숨을 돌릴 겸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입을 열었다.그분은 평소 연구회 활동도 꾸준히 하시고 수업 연구에 누구보다 진심인 분이었다. 수업 준비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고, 수백 명의 학생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성향까지 기억하려 애쓰는 분이었다. 학교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분의 뒷모습이 유난히 작고 지쳐 보였다.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참을 말없이 모니터만 응시하다가, 그분이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가만히 보면 열심히 사나 대충 사나 결과는 결국 비슷한 것 같아요.”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문장 속에 꾹꾹 눌러 담긴 허탈함의 깊이가 내 깊숙한 곳까지 전달되었다. 그분은 우리 직속 부장님 이야기를 꺼냈다. 부장님은 늘 정해진 시간에 가방을 챙겨 퇴근하셨고, 본인이 맡아야 할 골치 아픈 업무들도 은근슬쩍 동료 교사들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다. 그 덕분에 누군가는 더 늦게까지 남아서 남의 일까지 처리해야 했고, 그 ‘누군가’는 대개 우리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삶의 모습이었다. 일을 적당히 미루고 자기 시간을 챙기던 부장님은 이미 안정적인 내 집 마련을 마치고 여유로운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수업은 늘 비슷하고 성의 없어 보였지만 학생들에게 큰 원성을 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에 띄게 존경받지도 않는 딱 중간의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밤늦게까지 수업안을 짜고 학생 상담에 매달리던 사회 선생님은 정작 본인의 삶이 점점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고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날의 나는 그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공감이 올라왔다. 밤 9시가 넘은 교무실에서 엑셀 화면의 숫자들을 들여다보며 나 역시 자문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내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학생들을 먼저 생각하고 내 역량을 쏟아붓는 이 삶이, 훗날 나에게 어떤 실질적인 보상을 해줄까.'

당장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답은 참담했다. 성실하게 살지 않아도 이미 자산을 축적하고 안정 궤도에 오른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무수저로 시작해 하루하루를 쥐어짜듯 사는 내 노력의 결과물은 너무나 미약해 보였다. 성실함이 반드시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교과서적인 말들이 그날 밤만큼은 참 공허하게 느껴졌다. 정말 열심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의 끝이 다르지 않다면, 지금 헛된 힘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야 인정하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다시 20대나 30대의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는 단박에 NO! 를 외칠 것이다. 다시 그만큼 열심히 살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 시간에 후회가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체력도 마음도 그때만큼 뜨겁지 않고, 이제는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성실함은 당장 눈에 보이는 돈이나 직위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사람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태도로, 어려운 문제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자세로 남는다. 그 고단했던 초과근무의 시간들을 지나오며 '삶을 버티는 근육'을 얻었다. 그것은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나만의 자산이다.

당시 함께 한숨을 쉬던 사회 선생님과는 아쉽게도 연락이 끊겼다. 각자의 삶이 바쁘다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지금쯤 그분은 당시의 부장님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깊은 삶을 살고 계실 것이라고. 조직 안에서의 승진이나 속도는 조금 느렸을지 몰라도, 대체 불가능한 실력과 진심을 가진 사람은 결국 자신만의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가끔은 수저 계급론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부모의 재력으로 인생의 선택지가 이미 결정된 금수저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까. 아마 상위 5퍼센트나 10퍼센트 남짓일 것이다.

나는 그 화려한 명단에 속하지 않는다. 흙수저라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아무것도 쥔 것 없는 '무수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내 손으로 수저를 만들었다. 흙수저를 빚고, 그것을 조금씩 닦아 동수저로 만들어왔다. 살면서 깨달은 귀한 진리는 수저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드는 법만 알면 살아가는 동안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은 없어도, 내가 흘린 땀으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반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동수저의 삶도 충분히 따뜻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짠테크 역시 단순히 돈을 모으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한 번에 수억 원을 버는 대단한 비결은 없었지만, 매달 적금을 붓고 지출을 줄이는 행위들은 내 삶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작은 기둥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위기가 닥쳤을 때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나를 잡아주는 최소한의 안전망, 그것이 내가 짠테크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초과근무 속에서 동료들과 나누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나 혼자만 이 짐을 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동질감, 누군가와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는 유대감은 그 힘들었던 학교를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게 해주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당장 수익률로 계산되지 않는다. 통장의 잔고처럼 매일 눈에 보이는 수치로 찍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에 남는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으로, 그리고 내 몫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지는 당당한 태도로 돌아온다.

이 단순한 사실을 꽤 먼 길을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한다. 그때의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대단한 성과나 보상이 아니라, 그 고단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나를 믿고, 내가 쌓아온 시간을 믿는다.


* 이 이야기는 미혼모의 집 마련과 생존을 기록한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