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 2: 나에게는 주거안정권과 행복추구권이 있다.

미혼모 내집마련기 17

by 누드빼빼로

독기 승천.


2018년, 서른세 번째 생일에 내가 받은 선물은 ‘부적격 통보’라는 이름의 절망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 우울의 바다를 떠돌았다. 어느 날은 독기가 가득 올라 뭐라도 해야지 싶어 주먹을 불끈 쥐다가도, 어둠이 깔리면 무력함에 짓눌려 이불 속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를 서둘렀더라면', '법이 이토록 차가운 줄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뒤늦은 자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억울함을 넘어서니 가슴 깊은 곳에 한(恨)이 서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냥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등 뒤에는 내가 지켜야 할 아이가 있었고, 내 앞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내 생애 처음으로 영어 성적 78점을 받았던 날이다. 아무리 스스로 다시 채점해 봐도 내 점수는 분명히 83점이었다. 70점대 점수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거니와, 설령 망친 시험이라 해도 78점이라는 숫자는 내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교과 선생님을 찾아가 서술형 채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말씀드렸으나, 돌아온 답변은 "이상이 없다"는 차가운 단언이었다. 물러서지 않고 다시 점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일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극도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절박한 순간에 직면할 때마다 몸이 먼저 보내는 신호였다.


선생님은 채점에 이상이 없는데 왜 자꾸 번거롭게 하느냐며 짜증을 내셨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점수를 안고 돌아설 수 없었다. 끈질긴 요구 끝에 답안지를 직접 확인한 순간, 내 눈은 틀리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주어진 문장을 먼저 적은 뒤 정답 부분에 정성껏 밑줄까지 그어두었다. 선생님은 그 밑줄을 보지 못한 채 앞부분만 대강 훑고 틀렸다고 채점한 것이었다. 결국 점수는 내 눈앞에서 83점으로 정정되었다. 생애 가장 낮은 영어 점수였지만, 80점은 넘긴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켰던 그날, 나는 내 권리는 오직 내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공공임대 당첨 부적격 판정 과정에서도 그때와 똑같은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창구 직원의 말을 듣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고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 몸이 먼저 말하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잘못된 일이며, 절대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해되지 않는 법의 잣대 때문에 아이와 살 집을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바로 국민신문고를 두드렸다. LH와 국토교통부에 연달아 민원을 넣고 답변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무미건조한 답변뿐이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LH는 국토교통부 소관이니 그쪽에 문의하라고 하고, 국토교통부는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책임은 LH에 있다며 말을 돌렸다.


오기가 생겼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의 실랑이가 아니라 한 가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나의 행복추구권이 무참히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책임을 떠넘기며 핑퐁게임을 즐기는 두 거대 기관을 뒤로하고, 나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상 조사를 요청했다. 동시에 독학하듯 관련 법규와 사례들을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정적인 모순을 발견했다.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무주택 기간은 신청자가 만 30세가 되는 날부터 기안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예외 규정이 있다. 만 30세 이전이라도 ‘혼인’한 경우에는 혼인관계증명서에 등재된 혼인신고일부터 무주택 기간을 산정한다. 법이 이러한 예외를 둔 본질적인 이유는 혼인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단위인 ‘가정’을 꾸린 이들에게 주거 안정의 우선권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신혼부부 특별공급 등에서는 혼인신고 전이라도 청첩장이나 예식장 계약서만으로 가정의 형성을 인정해 주는 유연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의 상황을 이 법리적 본질에 대조해 보았다. 결혼식을 올린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떠났고, 행정기관이 문을 닫은 연휴 탓에 혼인신고라는 행정적 절차만 마치지 못했을 뿐, 나는 이미 국가로부터 유족 연금을 받는 명확한 ‘가족의 당사자’였다. 또한 아이를 낳고 독립된 세대를 구성해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왔다면, 그 시점부터 이미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정의 실체’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혼인신고서라는 종이 한 장의 유무가 이미 실존하는 가족의 삶과 그들이 겪어온 무주택의 세월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LH와 국토부의 기계적인 법 해석이 헌법이 보장하는 주거안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얼마나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써 내려갔다. 법의 문구 뒤에 숨은 ‘입법 취지’를 망각한 행정은 폭력과 다름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혼자만의 싸움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 나를 도와줄 민간 기관들에도 연락을 취했다. 한부모연합, 미혼모지원네트워크, 한국미혼모협회 등 닥치는 대로 문을 두드렸다. 모든 곳이 따뜻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곳은 "우리는 직접적인 물품 지원이 우선이다, 당신의 집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차가운 거절 앞에서 다시 한번 무너질 뻔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한부모연합 대표님과 연결되었다. 대표님은 내 서류와 상황을 꼼꼼히 살피시더니, "이것은 분명히 제도의 맹점이며 문제가 있다"며 힘을 실어주셨다. 기관의 이름으로 함께 민원을 넣어주기로 하신 것이다. 누군가 내 싸움이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던 울렁거림이 조금은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15살의 내가 5점을 되찾기 위해 교무실을 떠나지 못했듯, 서른세 살의 나는 내 아이와 함께 살 집을 지키기 위해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었다. 법은 차갑고 행정은 무책임하지만, 나는 나의 정답지에 스스로 그어놓은 밑줄을 믿었다. 내가 치열하게 증명해온 삶의 무게가 결코 서류 한 장의 부재에 휘둘릴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펜을 들고 나의 목소리를 정리했다. 이 기록은 단순히 집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부당한 시스템에 내지르는 비명이자 나를 지키겠다는 맹세였다.

나의 투쟁은 이제 막 서막을 올렸을 뿐이었다.


* 이 이야기는 미혼모의 집 마련과 생존을 기록한 연재입니다. 신문고 시리즈는 잠시 쉬었다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