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남긴 말없는 흔적을 바라보며
마추픽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초등학생 때부터 교과서에서 숱하게 보고 들어왔던 그곳. 어쩌면 페루에 온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바로 그곳.
정말이지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그곳을 더욱더 신비로운 곳으로 만든다. 아찔하게 깎여있는 바위 산들과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 옆을 기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간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도착한 마을, 아구아스깔리엔떼스. '따듯한 물'이라는 뜻의 이 마을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로의 애니 속의 신비로운 전설이 숨어있는 마을 같다. 마추픽추를 찾아온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가득한 곳이라 그런지 마을에는 활기가 가득하다. 다들 씩씩하게 자기 덩치만 한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무 데나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작은 산골 마을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다음날 마추픽추를 오른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다들 광장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우리도 맥주를 한 병씩 사들고 광장 앞 벤치에 앉았다. 내일 날씨는 좋아야 할 텐데, 늦잠 자면 어떡하지 등의 수다를 떨며 고대 문명을 마주하기 전 떨리는 마음을 털어내 보았다. 구석에서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외국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그렇게 신비로운 마을의 밤은 저물어 갔다.
이른 새벽, 떨리는 마음으로 일찍 채비를 하고 나섰다. 새벽 5시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대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줄이 엄청나게 길게 이어져 있었다. 새삼 꼭두새벽부터 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 열정과 설렘이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산을 오르는 내내 창문 밖 풍경에는 높은 산들이 이어졌다. 한쪽으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한쪽으로는 거의 절벽에 가까운 바위산들이었다. 버스 한 대가 겨우겨우 지나는 좁은 길을 따라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어떻게 이 속에 도시를 만들었지?' 하는 물음만 커져갔다.
입장 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줄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입장했다. 처음에 입구를 들어가자 마추픽추의 일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이른 아침에 가면 안개가 껴서 처음엔 잘 안 보인다고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채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 돌로 만든 집들과 계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일부러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조금 더, 더 위로 올라갔다. 내가 생각하는 마추픽추를 한눈에 감상하고 싶어서였다. 어느 정도 올라가서 동행들과 함께 하나, 둘, 셋 짠! 하고 뒤를 돌아봤다. 축복받은 날씨 덕분에, 시야를 가리는 안개라곤 하나도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마추픽추와 와이나 픽추, 그리고 그 주변 자연까지 모두 다 한 눈에 담겼다.
사실, 너무 많이 봐왔던 이미지라 큰 감흥이 있을까 했었는데, 이렇게 말문이 막힐 줄이야... 흔히 우리가 보는 사진 속의 마추픽추는 돌들이 쌓인 고대 유적지의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마추픽추는 바로 그 자연 한 가운데 있기에 놀라운 것이었다.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산들과 절벽 아래를 힘차게 흐르는 우루밤바 강까지... 마추픽추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강렬한 태양 아래, 하늘과 가까이 닿아있는 이곳이라면 저절로 자연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구름 몇 점, 강렬한 태양, 수많은 바위산들이 둘러싼 첩첩산중 산꼭대기에 세워진 공중도시.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고, 수백 년간 잠들어있었던 잃어버린 도시. 한 꼬마가 하이럼 빙엄을 데려와주었다는 이 곳. 그렇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 가히 기적 일 정도로 자연 속 깊숙이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른 시각에도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라마 무리들은 몇백 년 전에도 그랬다는 듯 여유롭게 절벽을 가뿐히 오가며 풀을 뜯고 있었다.
마추픽추의 유적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 전, 잉카 브릿지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전쟁 시 적이 침입하면 끊고 달아나기 위해 절벽에 만들어놓은 다리인 잉카 브릿지. 그것을 보기 위해선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사람 한명만 지나갈만한 좁은 길이기 때문에 아찔하기 그지없다.(심지어 이곳에서는 셀피를 찍지 말라는 표지판까지 있었다.) 하지만 절벽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끝내주게 멋있었다.
다시 마추픽추로 돌아와 그들이 살던 집, 신전, 광장, 논밭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둘러보았다. 가이드를 미처 신청하지 않은 우리는 그저 찬찬히 돌아다니며 상상과 더불어 이해를 하기로 한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실컷 찍고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그늘 밑 바위에 앉아 가만히 마추픽추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여기 그들이 있었고, 그들또한 사랑하며 다투며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겠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체 게바라가 그랬던가, 어떻게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냐고. 한때 드높은 산 꼭대기 위에서 아무도 모르는 도시를 설립한 그들. 이젠 말없는 돌들만이 남아 수많은 추측만을 남기고 전 세계의 사람들을 이 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잉카인들의 남기고 간 흔적 위에 한국이라는 저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날아온 25살의 대학생이 서 있다. 그들의 흔적은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태양 바로 아래에서 살았던 100년 전 그들의 삶도, 그리고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여기 와 있는 나의 삶도 놀랍도록 신비 그 자체였다. 한참 동안 그런 경이로움을 안고는 멍하니 마추픽추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