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P. Mascagni(1863-1945, 이탈리아)

by 세실리아

몇 해 전 늦은 밤, 서울역 역사를 빠져나오던 길이었다. 낮 동안의 활기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한산해진 거리에는 하루의 피로가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리어카를 끌고 천천히 다가오던 한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와 삶의 무게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순간 묘한 감정이 일었다. 한때는 그도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평범한 삶을 일궈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삶에 이토록 고단하고 쓸쓸한 무게를 드리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땀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청계천 8가, 천지인

포크 그룹 천지인의 노래 '청계천 8가'가 그려내는 풍경 역시 화려하지 않다. 땀 냄새 밴 거리에서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의 거친 숨결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예술의 시선이 현실을 향하기 시작하는 자리도 이런 장면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이야말로 예술이 오래 붙잡아 온 소재이기 때문이다.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우리 곁의 평범한 이웃들이 무대의 중심에 설 때, 이야기는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청계천(1988~2023) _이한구 사진작가
청계천(1988~2023) _이한구 사진작가


이러한 시선은 19세기말 오페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쥬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현실의 인물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면, 그 흐름을 한층 밀어붙인 것이 바로 '베리즈모 Verismo', 즉 사실주의 오페라였다. 벨칸토 오페라 특유의 화려한 기교와 비현실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날것 그대로의 삶을 올리려는 시도였다. 그 정점에 1890년 발표된 이탈리아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단막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있다.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특별한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과 질투, 배신과 복수 같은 감정이 좁은 공동체 안에서 부딪히며 비극으로 치닫는다. 거대한 역사를 대신해 인간 감정의 날카로운 단면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단막이라는 짧은 형식 속에서 이야기는 빠르게 응축된다. 제대한 청년 투리두와 옛 연인 롤라, 그리고 투리두에게 버림받은 산투차. 세 사람의 뒤엉킨 관계는 부활절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대비되며 비극의 긴장을 더욱 높인다. 음악 역시 장식적인 기교보다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에 초점을 맞춘다. 격정적인 흐름의 한가운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선율이 조용히 떠오른다. 이 오페라의 백미로 꼽히는 '간주곡 Intermezzo'이다. 산투차가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한 뒤, 피할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되기 직전에 연주되는 곡이다.


현악기의 잔잔한 선율로 시작되는 이 음악은 무대 위의 격정과 달리 지극히 평온하다. 소박한 선율이 반복되며 공간을 채우는 동안 관객은 잠시 숨을 고른다. 소란스러운 삶 속에 불현듯 찾아오는 짧은 안식처럼, 혹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도처럼 들린다. 음악이 끝난 뒤 남는 여운 속에서 우리는 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얼굴들이다. 이것이 바로 베리즈모 오페라가 바라본 세계, 곧 우리의 삶과 닮은 인간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오는 7월 3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솔오페라단 창단 2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로 선보인다.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과 그 끝에서 울려 퍼지는 위로 같은 음악을 통해, 우리 삶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라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_시칠리아 타오르미나 극장(2017) / 정명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

구성 단막(약 70~80분)

대본 귀도 메나시 Guido Menasci

초연 1890년 5월 17일, 로마 코스탄치 극장

배경 시칠리아의 한 마을 광장

등장인물

산투차 Santuzza - 시골 처녀 / 소프라노

투리두 Turiddu -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 마을 청년 / 테너

루치아 Lucia - 투리두의 어머니 / 콘트랄토

알피오 Alfio - 마을의 마부 / 바리톤

롤라 Lola - 알피오의 아내 / 메조소프라노


줄거리

막이 오르기 전, 투리두가 옛 연인이자 현재 마부 알피오의 아내인 롤라를 찬미하는 노래 '시칠리아나(Siciliana)'가 연주되며 비극의 전조를 알린다.

부활절 아침, 시칠리아의 한 마을 광장. 투리두에게 버림받은 산투차가 마마 루치아의 주점을 찾아와 투리두의 행방을 묻는다. 루치아는 아들이 포도주를 사러 외지에 나갔다고 말하지만, 산투차는 투리두가 밤사이 마을에 머물렀다는 목격담을 근거로 이를 부정한다. 이때 등장한 마부 알피오가 자신의 아내 롤라를 자랑하며, 정작 자신도 아침에 투리두를 보았다고 언급하여 긴장을 고조시킨다.

부활절 미사가 시작되고 광장에 홀로 남은 산투차는 루치아에게 자신의 비극적 처지를 고백한다. 군 복무 시절 연인이었던 롤라가 알피오와 결혼하자 투리두는 복수심에 산투차를 유혹했으나 결국 다시 롤라에게 돌아가 산투차를 버리고 말았다. 산투차는 투리두에게 매달리며 관계 회복을 호소하지만, 투리두는 냉정하게 그녀를 밀치고 롤라를 따라 교회로 들어간다.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 산투차는 뒤늦게 나타난 알피오에게 롤라와 투리두의 불륜 사실을 폭로한다. 분노한 알피오는 피의 복수를 맹세한다.

미사가 끝난 뒤 투리두는 마을 사람들과 축배의 노래 '브린디시(Brindisi)'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운다. 그러나 알피오가 나타나자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투리두가 술을 권하지만 알피오는 그것이 자신에게는 독이 될 것이라며 거절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결투가 벌어진다. 죽음을 예감한 투리두는 어머니 루치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 홀로 남겨질 산투차를 돌봐줄 것을 부탁한 뒤 결투장으로 향한다. 잠시 후 정적을 깨는 여인의 비명과 함께 투리두의 죽음이 선포되며 막이 내린다.


사진 출처: 이한구 사진전 '깊고 더럽고 찬란한'(2025)

https://www.artkoreatv.com/news/articleView.html?idxno=9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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