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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Giuseppe Verdi(1813-1901)

by 세실리아

살면서 대구를 방문한 햇수는 정말이지 손에 꼽는다. 그만큼 나와는 인연이 없는 도시.. 매년 벼르기만 했던 대구오페라하우스도 이번이 첫 방문이다. 멀리서 어렴풋이 조명처럼 빛나던 공연장에 가까이 다가가자 음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공연장 앞 야외 마당을 가득 메운 와인 향기와 갈라콘서트, 개막일을 기념한 축사와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 저마다 멋지게 차려 입은 관객들 사이에도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공연은 아직 막을 올리지 않았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설렘은 이미 나를 근사한 음악 속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유학 시절 베로나 Verona 아레나 극장에서 처음으로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를 감상했던 그 밤, 수천 명의 관중이 모인 야외 원형극장에 울려 퍼지던 소프라노의 목소리, 무대에서 제일 먼 곳에 앉았음에도 정확히 내 명치까지 파고든 그 감동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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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작곡가 베르디 Giuseppe Verdi(1813-1901)는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 근처의 작은 마을 론콜레 Roncole에서 태어났다. 농민 가정 출신으로 도시 엘리트 출신 작곡가들과 달리 소박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이런 배경은 그의 오페라가 귀족적·신화적 소재보다 평범한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현실을 자주 다루는 성향과 맞닿았다. 젋은 시절 아내와 두 자녀를 연달아 잃는 비극을 경험하고 그 충격 속에서 잠시 작곡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이후 오페라《나부코》(1842)로 극적인 재기에 성공하면서 음악 속에 개인적 고통과 집단적 투쟁을 예술로 승화하는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 3막에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Va, pensiero'는 이탈리아 국민에게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베르디가 민족주의적 상징이 된 계기이기도 하다.

리소르지멘토 il 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와의 연관

이탈리아 통일 과정을 묘사한 '밀라노의 5일'. (출처: Baldassare Verazzi, 1886 / Wikimedia Commons)

당시 19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는 여러 작은 국가와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랜 시간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분열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운동은 '리소르지멘토'라고 불렸고, '부활'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이탈리아인들의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국민들의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면서 베르디를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상징이자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고, 베르디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은 그의 오페라에서 자주 보이는 자유, 민족, 저항의 테마와 맞물린다. 말년의 작품들 중 특히《오텔로》와《팔스타프》에서는 더 이상 민족적 투쟁이나 영웅적 주제가 아닌 인간 내면의 비극과 유머, 삶의 허무와 풍요로움을 다루었는데, 이는 베르디가 긴 생애 동안 겪은 개인적 성찰과 연륜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음유시인 Il Trovatore

12-13세기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 겸 연주자로 스스로 시와 음악을 창작하여 궁정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전문적 시인·음악가였다. 오늘날로 치면 싱어송라이터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중세의 음유시인들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였다.


음악적 특징

이탈리아 전통답게 선율 중심의 서정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노래 속에서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특징을 보인다. 초기작《나부코》나《롬바르디아인》에서 보이듯 합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집단적 목소리로 등장하며 민족적·사회적 정서를 반영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성악 중심으로 관현악은 단순한 반주였지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관현악이 드라마를 이끄는 힘을 지니는데《오텔로》의 폭풍우 장면,《팔스타프》의 섬세한 색채는 독일 오페라(특히 바그너)의 영향을 의식하면서도 이탈리아적 선율미와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같은 중기 걸작에서는 인간 심리를 깊이 파고들었고, 질투·증오·복수 같은 격렬한 감정을 음악으로 치밀하게 그렸내며 사실주의 오페라 Verismo Opera와 같은 요소를 갖추기도 하였다.

사실주의 오페라 Verismo Opera

어원은 이탈리아어 vero(진실)에서 나온 개념으로 '진실적, 사실적' 오페라라는 뜻을 갖는다. 문학적 배경으로 프랑스의 자연주의, 특히 에밀 졸라의 사실주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고 귀족이나 영웅 대신 평범한 시골 사람, 서민, 범죄자, 노동자와 같은 일상의 인물과 사건이 주인공이 된다. 음악적 특징으로는 짧고 격정적인 아리아, 극적 연속성, 관현악의 긴장감을 들 수 있다.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적인 예로 마스카니의《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레온카발로의《팔리아치》, 푸치니의 《토스카》등이 있다.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주요 등장인물

만리코 Manrico - 음유시인, 아주체나의 양아들, 군대의 지휘관(테너)

루나백작 Conte di Luna - 귀족, 만리코의 라이벌(바리톤)

레오노라 Leonora - 귀족 여성, 만리코의 연인(소프라노)

아주체나 Azucena - 집시여인, 만리코의 양모(메조소프라노)

페란도 Ferrando - 루나 백작 군대의 수장(베이스)

루이스 Ruiz 등 - 만리코 측 인물들


상세 줄거리

제1막 - 결투(Part Ⅰ: Il duello)

# 장면 1: 알하페리아 성 - 루나백작 측 경비실

페란도와 수하들이 밤중 경계근무를 서는 가운데 페란도가 가문에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선대의 루나백작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어느날 작은아들이 요람에 누워있을 때 한 나이 든 집시 여인이 요람의 아이를 보았고, 그 이후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것이 노파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한 백작은 마녀라는 혐의로 집시 여인을 잡아 화형시켰고, 그 여인의 어린 딸(아주체나)은 어머니의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다는 내용이다.

# 장면 2: 성 앞 - 수도원 앞

레오노라는 시녀 이네스와 대화하며 밤중에 누군가(음유시인, 즉 만리코)가 창가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고백한다. 이 장면은 두 주인공의 감정적 기반을 구축하며 관객에게 만리코의 존재를 은근히 알린다.

# 장면 3: 성 입구와 결투의 위기

루나백작은 레오노라에게 접근해 구애를 시도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만리코의 노래로 인해 상황이 뒤얽힌다. 어둠 속에서 레오노라가 실수로 루나와 만리코를 혼동하는 일이 발생하고, 오해로 루나와 만리코 사이에 결투가 선언된다. 만리코는 자신의 정체(트로바토레)를 밝히고 두 사람의 대립은 극화된다. 이 막에서는 사랑·질투에 얽힌 인물들의 동기와 복수를 배경으로 하는 아주체나의 서사가 드러난다.


제2막 - 집시들의 야영(Part II: The Gypsy )

# 장면 1: 비스카이아의 집시 야영지 - 아침 풍경

집시들이 아침 노동을 하는 가운데 아주체나가 자꾸만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아주체나는 어머니가 화형당하던 장면을 기억하고, 그 장면에서 들은 '복수의 명령'을 회상한다. 이 장면은 작품의 감정적·물적 배경(집시 공동체, ‘노동+축제’의 아이러니)을 조형한다.

# 장면 2: 아주체나와 만리코의 모자 관계

만리코는 자신을 길러 준 아주체나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아주체나는 끔찍한 꿈에서 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가 곧 그것을 '꿈'으로 회수하며, 만리코에게 자신이 그를 항상 돌보아왔음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불확실성이 강조되며 아주체나의 과거(아기 납치·화형 관련 진실)는 은밀한 소문으로 관객에게 남는다.

극적 기능: 이 막은 극중 신비와 비극의 근원을 관객에게 환기시키며, 동시에 만리코와 레오노라의 감정선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흔히 '대장간의 합창'이라 불리는 'Anvil Chorus'는 이 작품의 유명한 합창곡으로 2막의 시작과 함께 음악적·극적 전환을 제공한다. 집시들이 대장간에서 일하며 모루(주로 금속을 망치로 두들겨 단조할 때 밑에 받치는 기구로 대장간에서 빠질 수 없는 물건 중 하나)를 치는 소리와 함께 웅장하고 역동적인 곡으로 작곡가 베르디의 뛰어난 극적 표현력을 느낄 수 있다.


제3막 - 집시의 아들(Part III: Il figlio della zingara)

# 장면 1: 루나 백작의 군진 - 성 주변 전투 전초

루나백작이 주도하는 군대가 만리코가 거주하는 성을 공략하려는 상황이다. 페란도는 야영지 근처에서 아주체나를 체포해 데려온다. 아주체나가 루나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병사들과 백작은 그녀가 오래전 잃어버린 형제(혹은 그 사건과 연루된 인물)와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 장면 2: 성 안 방 - 레오노라와 만리코의 약속

만리코와 레오노라는 결혼을 약속하거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려 한다. 그러던 중 루이스가 달려와 아주체나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질 위험이 있음을 알린다. 만리코는 즉시 병사들을 모아 아주체나를 구하러 나가려 하고, ‘Di quella pira 저 타오르는 불길을 보라'에 해당하는 격정적인 아리아를 통해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기로 결의하는데 이 곡은 관객에게 강렬한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제공한다.

# 장면 3: 전투·포위·탈출 시도

만리코의 반격과 공격 시도가 이어지고 루나백작 측과 만리코 측 사이에 일시적 충돌이 발생한다. 전투의 결과로 만리코는 일시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이 막은 만리코의 충성과 아주체나의 과거가 충돌하며 극적 긴장을 높인다.


제4막 - 최후(Part IV: Finale )

# 장면 1: 감옥 - 만리코와 아주체나의 투옥

만리코와 아주체나는 루나백작의 수중에 포로로 잡혀 감옥에 수감된다. 레오노라는 만리코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한다. 레오노라는 자진하여 루나백작에게 자신을 바치겠다고 제안하고, 루나백작은 이를 기쁘게 수락한다. 레오노라는 약속을 체결한 뒤 비밀리에 서서히 작용하는 독약을 복용한다. 이 행동은 레오노라의 도덕적, 정서적 굴복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려는 의식적 자기희생으로 해석된다.

# 장면 2: 폭로와 비극

루나백작은 만리코의 처형을 명령하고 만리코는 처형된다. 처형 직전 또는 직후 아주체나는 루나에게 큰 고백을 한다. 과거에 납치된 아이(루나의 형제)가 사실 만리코이며, 아주체나가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다 실수로 자신의 아이를 태워 죽였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아주체나의 혼란과 복수로 인해 아이의 뒤바뀜이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만리코와 루나백작이 형제 관계였음이 드러난다. 이 폭로는 작품의 마지막 반전으로서 복수의 아이러니와 인과의 문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 장면 3: 레오노라의 죽음과 남은 자들의 절망

레오노라는 이미 복용한 독약으로 쇠약해지거나 죽음에 이른다. 루나백작은 만리코가 자신과 혈연적 관계였음을 깨닫고 복수의 공허함과 죄책감을 마주한다.


Epilogue

아주체나의 복수는 정의일까, 파멸일까. 복수의 역설은 행위자가 스스로의 희생자가 된다는 데 있다.《일 트로바토레》는 그러한 인간 내면의 어둠을 서늘하게 비추지만, 음악적 완성도로 빛나는 작품이다. 처음 베로나 아레나 극장에서 이 오페라를 접했을 때 줄거리를 알지 못한 채 받은 감동은 오롯이 음악의 힘이었다. 베르디의 천재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마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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