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Helene Hanff(1916-1997, 미국 필라델피아)

by 세실리아

(2025. 2. 7.)


요새 내가 푹 빠져있는 여자 - 헬렌 한프(Helene Hanff, 1916-97), 뉴욕의 무명 작가였던 그녀가 런던의 중고서적상인 '마크스 서점'에서 수십 권의 중고서적을 구입하며 나눈 - 자그마치 20년 동안의 편지들을 모은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는 2025년 기준 내 최애 인생책이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 읽은 후 소장용으로 한 권을 구입했고, 어제 또 한 권을 더 주문했는데 이건 올해 전근가시는 영양사 선생님께 작은 선물과 함께 드리려고 함. 지난 4년간 너무 맛있고 알찬 급식메뉴로 일터에서 큰 기쁨을 주신 우리의 급식대가가 떠나시는 게 무척이나 아쉽고 슬프고나ㅠ

2025. 2. 7.(금) 금강변에서


F. P. D를 기억하며


(p9) 1949년 10월 5일

선생님께: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주 고가의 희귀본이나 아니면 이것저것 끼적여놓은 반스앤드노블스의 학생판으로 밖에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주시겠습니까?

(p12) 1949년 11월 3일

여러분께, 책이 무사히 도착했어요. 스티븐슨은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랍니다. 이 부드러운 고급 피지와 뽀얀 상앗빛 책장은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겠고요. 미국 책들의 창백한 백지와 딱딱한 마분지 표지만 보아온 저로서는 책을 만지는 일이 이런 즐거움도 줄 수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답니다.

(p16) 1949년 11월 18일

혹시 랜더의 상상의 대화를 구할 수 있을까요? 여러 권짜리로 아는데, 제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 대화편이 실린 권이에요. 이솝과 로도피스의 대화가 실려 있다면, 그게 바로 제가 찾는 거죠.

(p18) 1949년 12월 8일

새비지 랜더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책을 잡자 곧바로 로마 대화편 부분이 펼쳐지더군요. 두 도시가 전쟁으로 파괴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지나가는 로마 병사들을 붙들고 부디 자기네를 밟고 지나가 이 고통을 끝나달라고 애원하는 대목이었어요. 걱정할 일은 기근밖에 없는 이솝과 로도피스의 대화편으로 넘어가니 안도감마저 들었습니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닛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p23) 1950년 3월 25일

봄날도 다가오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셸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와이엇이나 존슨 같은 시인으로 당신이 직접 판단해주었으면 해요. 그냥 아담한 책이면 되겠는데, 이왕이면 바지 주머니에 꽂고 센트럴파크로 산책 나갈 만큼 작은 책이면 더 좋겠고요. 그러니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뭔가를 좀 찾아보라고요! 그 서점이 어떠헥 계속 돌아가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요.

(p28) 1950년 4월 10일

런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저는 임항 열차에서 내려 지저분한 보도를 이 두 발로 직접 밟을 그 날을 꿈꾸며 살아간답니다. 걸어서 버클리 광장까지 올라갔다가 윔폴 거리로 내려오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런던 탑 입성을 거부하고 앉았던 세인트폴 성당의 그 계단, 존 던이 앉아 연설하던 바로 그 계단을 저도 한 번 밟아보고 싶어요. 대전 중에 런던 주재원으로 나갔던 신문기자 한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 말이 관광객들은 영국에 어떤 고정 관념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늘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는대료. 전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아 갈 거라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거기에 있어요." 안녕을 빌며 - 헬렌 한프

(p29) 1950년 9월 20일

언젠가 뉴먼의 대학의 이상에 대해 문의하셨죠. 이 책의 초판에 관심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한 부를 구입했는데, 세부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뉴먼(존 헨리, 명예신학박사) 더블린의 천주교도를 대상으로 행산 대학 교육의 본질과 전말에 관한 강연. 초판, 더블린, 전8권, 송아지 가죽 장정. 몇몇 쪽에 약간 빛 바랜 얼룩이 있으나 제본에 상한 곳이 없는 상태 양호한 중고서. 가격 6달러 원하실 경우를 생각해서 답장을 주실 때까지 두 권 모두 한쪽에 따로 보관해두겠습니다. 다정한 안부를 전하며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p31) 1950년 9월 25일

친애하는 프랭크: 예, 원하죠. 초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 책의 초판이라면요! 휴, 세상에. 벌써 눈앞에 아른거려요. 옥스퍼드 시선도 보내주세요. 제가 원가를 어느 다른 곳에서 찾았을까 궁금해하실 것 없어요. 이제 더는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않으니까요. 이 타자기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책을 구할 수 있는데, 뭐하러 저 17번가까지 내려가 그 더럽고 못난 책들을 사겠어요? 여기 이 자리에서는 런던이 17번가보다 훨씬 가깝답니다.

(p34) 1950년 10월 15일

뉴먼이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 이제야 마음이 진정되네요. 이 책을 하루 종일 탁자 위에 두고 타자를 치다가 한 번씩 만져보곤 해요. 이게 첫판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책은 난생 처음 보기 때문이에요. 이걸 제가 소유한다는 사실에 살짝 죄책감마저 들어요. 은은하게 빛나는 가죽과 금박 도장과 아름다운 서체는 영국 어느 시골 가정의 소나무 책장에나 어울릴 만한 품격이에요. 이 책은 벽난로 옆에 놓인 가죽 안락 의자에서 읽어야 제격이지 이런 누추한 단칸방의 다 망가진 적갈색 장식벽 앞에 놓인 중고 침대 겸용 소파에서 읽을 것이 아니에요.


(p50-51) 1951년 4월 16일

채링크로스가 84번지의 친구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책, 고맙습니다. 책장 전체가 금테두리로 된 책은 가져보지 못했어요. 이 책이 제 생일에 도착했다는 사실, 믿어지세요? 여러분이 좀 덜 조심하여 카드를 쓰는 대신 속표지에다 글을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행여나 책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서적상의 본분이 거기서 발휘된 거겠죠? 현재의 소유자에게는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떄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중략) 이 아름다운 책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술과 담뱃재로 더럽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저 같은 사람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고상한 책입니다. 여러분의 벗 헬렌 한프

(p61) 1951년 11월 2일

혹시 양장본 성악곡 악보집도 취급하세요?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헨델의 메시아 같은 것으로요. 여기서도 셔머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겠지만 찬바람 부는 길을 50블록이나 가야 해서 먼저 여쭤봐야겠다 싶었어요. 처칠 일파의 승리, 축하드립니다. 배급량을 조금 늘려줬으면 좋겠네요. 도엘은 웨일스 성인가요? HH

(p63) 1951년 12월 7일

저희가 자그마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냅니다. 리넨인데, 그걸로 세금 내실 일이 없기는 라반디ㅏ. 소포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기재했고, 지금은 그저 행운을 빌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고 저희의 진심 어린 크리스마스와 새해 축원으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엘은 웨일스 성은 분명히 아닙니다. 프랑스 낱말 '노엘'의 원시적 압운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프랑스 성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p67) 1952년 1월 20일

건달걀을 더 보내주시고 싶어하신다니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도 겨울을 날 만큼은 남아 있답니다. 4월에서 9월 사이에는 저희쪽에도 달걀 사정이 괜찮은 편이에요. 한 번씩 배급이 나오면 조금씩 통조림과 맞바꾸곤 하는데, 한번은 특별한 경우로 건달걀 한 강통을 나일론 양말 한 켤레와 교환했답니다. 합법적인 건 아니지만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지요!

(p70) 1952년 2월 9일

서점 사람들이 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보냈는지 아니? 아일랜드풍 리넨 식탁보야. 진한 상앗빛에 고풍스러운 나뭇잎과 꽃 무늬를 손으로 수놓은 건데, 꽃은 송이마다 다른 빛깔로 아주 연한 색에서 아주 깊은 색까지 명암이 표현돼 있고. 이런 건 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물론 내가 고물상에서 산 접이식 탁자는 여지 없이 이런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지. 언제라도 물결치는 빅토리아풍 소매를 살짝 걷어올리고 우아한 팔놀림으로 상상 속의 그레고리풍 찻주전자로 차를 따르고픈 충동이 들 정도야. 우리, 네가 돌아오자마자 이 식탁보로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극을 하는 거야, 알았지? 엘러리가 대본당 250달러로 인상됐어. 6월까지 계속된다면 나도 영국행을 감행하여 나의 친애하는 서점을 직접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한테 그럴 배짱만 있다면 말이야. 5,000킬로미터라는 안전한 거리가 있기에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편지들을 써보낸 건데,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십중팔구는 내가 누군지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버릴 것 같아.

(p88-89) 저는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려요. 모두들 큰 충격을 받지요. 제 친구들은 책이라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친구들은 베스트셀러는 뭐든 다 가져다가 최대한 한 빠른 속도로 끝내버려요. 건너뛰는 데가 많을 거다. 하는 게 제 생각이죠. 그러고는 뭐든 두 번 다시 읽지 않으니 1년쯤 지나면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러는 사람들이 정작 제가 책 한 권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누구한테 주는 걸 보면 펄펄 뛰는 거예요. 그 친구들 구장은 이래요. 책을 사면 읽고서 책꽂이에 꽂아둬. 평생 다시 펼쳐보는 일이 없을지언정 내버리면 안 돼! 양장 제본한 책이라면 더욱더! 왜 안 된다는 거죠? 저 개인적으로는 나쁜 책보다 신성을 모독하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이에요. 아니, 그냥 범용한 수준의 책이라도 마찬가지죠. 노라와 훌륭한 휴가를 보냈으리라고 믿어요. 제 휴가는 센트럴파크에서 지나갔답니다. (중략) 그래도 책 구입은 중단할 생각이 없으니까 무언가 해주셔야 해요. 쇼의 연극 비평이 있는지 좀 찾아봐주시겠어요? 그리고 음악 비평도요? 여러 권 있는 걸로 알지만 뭐든 찾는 대로 보내주세요. 자, 프랭키, 잘 들어요. 곧 춥고 지루한 겨울이 되는데 저녁 때 애보기를 하게 됐어요. 그러니 읽을 것이 필요해요. 앉아 빈둥거리지만 말고 책 좀 찾아달라고요. hh


(p91) 1952년 12월 12일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으로는 불공평하다고 봐요. 제가 보낸 것은 일주일이면 싹 먹어치우고 설날이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제가 받은 것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가 누군가 그것을 아껴줄 이에게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잖아요. 저는 앞으로 태어날 애서가들을 위하여 최고의 구절들마다 연필로 살그머니 표시를 남겨둘 생각이에요. 모두에게 감사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헬렌

(p110) 1957년 5월 6일

미리 경고를 해줬더라면 좋았잖아! 그 서점으로 들어가 네 친구라고 말하니까 한마디로 우르르 몰려들더라. 네 친구 프랭크는 우리를 주말에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했고, 마크스 씨는 서점 뒤에서 나와 한프 양의 친구 분들이냐면서 악수를 청했고, 서점 사람들 전부가 우리하고 식사와 술을 하고 싶어하는 통에 간신히 살아 나왔다니까. 너의 다정한 윌리엄이 태어난 집을 너도 보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했어. 다음은 피라고, 그 다음은 코펜하겐 그리고 귀국은 23일이야. 사랑을 담아, 지니와 에드

(p144) 1969년 1월 29일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정말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또, 당신의 글솜씨도 부러웠답니다. 프랭크와 저는 아주 달랐어요. 그이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저는 언제나 자기 권리를 위해 맞서는 아일랜드 사람이었엉. 그이가 너무나 그리워요. 하루하루가 참 즐거웠거든요. 그이는 늘 책에 관한 것을 설명해주고 가르쳐주려고 애썼지요. 제 아이들은 멋진 숙녀가 되었고, 이런 점에서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도 저처럼 홀로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있겠죠? 횡설수설을 용서하세요. 사랑을 담아, 노라 언젠가 우리를 방문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딸아이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답니다.

(p145) 1969년 4월 11일

친애하는 캐서린- 책장을 정리하다가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여 앉아 순풍에 돛단 여행을 기원하며 몇 자 끼적입니다. 브라이언과 런던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길 빌어요. 브라이언이 전화로 '여비만 있다면 우리랑 같이 가시겠어요?' 그러는데,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헬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