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김진영(1952-2018)

by 세실리아

아침 미사 갔다가 두어 달 만에 손세차를 맡겨놓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2시간 동안 호사로운 시간을! 꽃계절이 되니 혼자만 알고픈 이곳이 더더 좋구나.. 이태리어는 단어 끝에 -ino나 -ette 같은 접미사를 붙이면 '작은'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Aria가 '공기', '바람'이니까 카페 이름이 '작은 바람'이라는 뜻이 되나? 열어둔 창문으로 바람 솔솔 드나들고, 괜히 살랑살랑 기분이가 즐거워지는 계절..


2017년 암 선고를 받고 2018년 작고하신 철학자 김진영 교수의 《아침의 피아노》. 이 귀한 책을 1년 가까이 책꽂이에 모셔두고 이제야 읽게 되다니; 내일은 또 내가 처음으로 맞는, 온전히 경이로운 새 날이다. 일하다가 틈틈이 학교 도서관에 내려가서 책도 읽고, 의식적으로 여유를 좀 가질 것!

2024. 4. 7. 카페 아리에떼

(p65) 꽃들이 찾아와 모여 앉아서 철없이 웃는다. 이런 아침 꽃들이 더 많이 피는 건 비 오면 따라오는 먼 허공의 빛 때문일까. 아즈텍 사람들에게 빛의 신과 비의 신은 하나였다.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사실만은 확실하다. 모든 것은 마침내 지나간다는 것: "이 놀라운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분명한 건 그 행복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 아니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p76) 일주일에 두 번씩 택배가 도착한다. 식이요법을 위한 채소들이다. 저 순수하고 청결한 채소들은 나의 남겨진 시간을 연장해 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시간의 연장이 필요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저 순결한 채소들도 내 몸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어디선가 들리는 꾸짖는 소리: "답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생각하지도 말아요. 그냥 청결한 채소를 먹고 몸을 청결하게 만들면 그만인 거예요. 그게 답이라는 걸 모르나요?"

(p77) TV를 본다. 모두들 모든 것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p92)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p95) 늘 듣던 말의 새로움: "날마다 오늘이 첫날이고 마지막 날이야."

(p97)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p118) 평정의 장소. 슬픔과 기쁨이 함게 머무는 곳. 음악이라는 고요의 세계.

(p160) 그의 몸은 나날이 망가졌지만 정신은 나날이 빛났다,라는 시의 역설은 옳지 않다. 몸을 지키는 일이 정신을 지키는 일이고 정신을 지키는 일이 몸을 지키는 일이다.

(p255) 환자의 삶을 산다는 것 - 그건 세상과 인생을 너무 열심히 구경한다는 것이다. 소풍을 끝내야 하는 천상병의 아이처럼. 고통을 열정으로 받아들였던 니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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