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
(2026. 3. 11.)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렇다. 다만 나에겐 삶에 대한 애착이 아직 남아 있으니 영원히가 아니라 딱 일주일 정도만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올해는 시작부터 업무가 꼬였다. 우연히 겹친 일들이 연달아 이어지더니 끝내 일을 만들었다. 매체에 보도와 기사가 올라오고, 우리 학생들과 알록달록 가꾸어 오던 도화지에 누군가 오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 속상하고 마음이 무겁다. 시스템과 구조 자체를 돌아보려는 시선은 왜 이리 드문 걸까. 무엇이든 물 수만 있다면 사람이나 사물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사나운 개들처럼, 이를 갈며 틈을 노리는 날 선 시선들만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과연 차가운 원칙만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또 원칙과 절차를 준수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올바른 길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199) 나 빼고 세상 모든 여행자들의 여행기는 늘 우아하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더할 나위 없이 운이 좋다. 그들은 매일매일 빛나는 날들 속에서 행복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나의 오스트리아는 빈틈없이 빼곡하게 불운했다. 축축하고 으슬으슬해. 와플도 맛이 없다. 오늘은 식당마저 실패다. 아 재수가 없다. 죽기 전에 오버트라운에 또 올 수 있을까? 하필 내 생에 단 한 번뿐인 오버트라운이 이렇다니! 안 행복한 날입니다. 머리는 곱실거리고 입술은 새파랗고 냄새날까 봐 신발도 못 벗겠고 할슈타트 호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여행자도 있다.
(P245)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문득문득 생각하게 되는 즈음이었다. 죽고 싶진 않고 이대로 살아야 한다니 이 생이 너무 벅차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 언제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 욕심만큼 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이 보잘것없는 것들을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하루하루가 너무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런 날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쉬이 떠날 줄을 모를 땐 책도 음악도 들어오지 않는다. 초록의 절정을 지나 조금씩 색을 바꿀 무렵이었다. 그렇게 백양사에 갔다. 때마침 추석 연휴가 다가오기도 했고, 며칠간 템플스테이를 하며 머물다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기도 했고. 오랜만에 정읍에 왔네. 좋구나. 이렇게 대번에 치유되는 마음이라니. 아직 템플스테이는 시작도 안 했는데, 사람의 마음이 이리도 간사하다. 쌍화차 한 잔에 삶에 대한 의지가 샘솟는다고? 얼었던 마음도, 몸도 스르르 녹는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불운한 날, 축축하고 으슬으슬한 날, 좋아하는 와플도 맛이 없는 날, 재수가 없는 날, 안 행복한 날, 사는 게 너무 벅차다 싶은 날, 책도 음악도 들어오지 않는 날.. 그러다 보면 다른 날도 오는 거지. 우아한 날, 빈틈없이 완벽하고 더할 나위 없이 운이 좋은 날, 행복으로 충만한 날, 따뜻한 차 한 잔에 삶에 대한 의지가 샘솟는 날. 얼었던 마음도, 몸도 스르르 녹는 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날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