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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May 30. 2018

흩어져버린 것들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한동안 내게 한남동은 서울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살게 된 동네가 그곳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열아홉 해 동안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 갇혀 있었던 나는 오로지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떠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능을 봤고 서울의 한중간, 한남동에 위치해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입학하기도 전부터 내가 다니게 될 대학이 이 년 후에 Y시로 옮겨진다는 소식이 들려오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찌됐건 내가 살았던 촌구석보다는 더욱 넓은 세계임이 틀림없었으니까.


처음으로 한남동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TV 속 재벌 총수들이 사는 동네인 줄만 알았던 한남동이 실은 한남동의 아주 작은 구역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구역은 십 대 시절 내가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촌구석의 집들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구질구질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월세가 비싸 결국 나는 한남 오거리에 위치한 낡은 상가건물의 반지하에 세를 얻어 살게 되었다. 슈퍼와 우유배급소 아래에 위치한 내 방에서는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이 출몰했다. 개미와 바퀴벌레는 기본이었고 때로는 전래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통통한 지네가 장판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라 믿었던 두꺼운 전공 책은 해충 박멸 도구로 전락했다. 도무지 사람 살 곳이 아닌 것 같은 집인데도 불구하고 월세는 벅찼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부유한) 한남동으로 달려가 브런치 전문 카페와 아이리시 펍에서 투잡을 뛰어야지만 간신히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가 있었다. 일주일에 쉬는 날이라고는 일요일 하루뿐이었는데, 밀린 잠을 해결하기 위해 늦잠이라도 자려치면 집 옆에 위치한 교회에서 새벽부터 성가 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울에 올라와 내가 사는 모습을 본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울었다. 사정이 나아지면 곧바로 방을 옮겨주겠다고도 했다. 나는 당연하지, 말하며 웃었다. 사정이 좋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있었다.

아이돌 연습생 S를 만나게 된 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우연이었다. 영문과의 전공 수업 중 ‘희곡실습’이라는 수업을 선택한 것은 지필고사를 치지 않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쉽게 수업을 이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다른 모든 신입생들의 판단들처럼, 내 판단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공교롭게도 해당 과목은 연극영화과와 연계 개설된 과목이었으며, 학기말에 소강당에 연극 무대를 세우는 본격 제작 실습 수업이었던 것이다. 연기나 연출의 경험은커녕, 연극을 본 적도 없던 나는 단지 영문과 학생이라는 이유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선택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햄릿>을 선택한 영문과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S는 우리 팀의 유일한 연극영화 전공생이었다. 나와 S는 햄릿과 오필리어 역을 맡게 되었다.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S가 나보다 한 살이 많으며, 대형 기획사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해왔고, 네이버에 이름을 검색하면 단역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두 개쯤 뜨는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S가 유달리 작고 갸름한 턱과 흰 피부, 통통한 볼살과 얇은 입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꽤 귀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최선을 다해 연극을 말아먹었고, 기말 공연 뒤풀이 자리였던 호프집 화장실 앞에서 키스한 뒤 사귀게 되었다.


처음으로 S가 내 방에 찾아왔던 날에는 벌레가 나오지 않았다. 그 무렵 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때 지네나 바퀴벌레가 룸메이트처럼 나를 맞아주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꽤 대단한 우연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믿었다.


그 방에서 S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사귄 지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 무렵, S는 데뷔조 발탁에 실패해 청담동의 연습생 숙소에서 쫓겨났으며 나는 등록금을 모으겠다는 명목으로 휴학을 한 뒤 주기적으로 자살 시도를 하곤 했다. 응급실에 실려가 위세척을 받거나 손목을 봉합하는 나의 이마를 짚어주었던 것은 언제나 S의 차가운 손이었다. 월세를 낼 돈과 여력이 없어 낙향할 위기를 맞았을 때 S가 나의 방에 들어와 월세를 내주기 시작했다. 내가 S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녀는 새벽에 병원에서 전화를 받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고 답했다. 별로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우리의 동거 생활은 그렇게 별 대단한 계기도 없이 시작됐다. 그 후 S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연습생들은 데뷔해 차트 1위를 휩쓸었고, S는 바퀴벌레를 때려잡으며 자주 울었다. 당시에 나는 원인 모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려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망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면 호흡이 가빠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옆 자리에 누운 S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S는 차가운 손으로 찬찬히 내 얼굴을 짚으며 (이제는 연예인이 되어버린) 친구들의 말 못할 치부를 폭로했다. 별로 재밌지도 않은 그 얘기를 듣다가 스르르 잠들곤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S는 역삼동에 있는 카페에 매니저로 취직해 생활비를 벌었으며, 틈틈이 본 오디션에 번번이 떨어졌다. 그사이 나는 대학병원에서 약을 타 먹으며 상태가 조금 나아졌고, 영문학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속여 종로에 있는 한 영어 학원의 파트타임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둘 다 정신없이 바빠 얼굴을 볼 일이 잘 없었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은총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노랫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했다. 겨울에는 원인 불명의 만성 피부질환을 함께 앓았다. 옷을 벗고 마주앉아 서로의 몸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연고를 발라주었다. 자기 전까지 서로에게 긁지 마, 긁지 마 하는 말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것을 자장가처럼 느끼게 되었다. 여름날은 더 속수무책이라, 공장에서나 쓸 법한 커다란 선풍기를 사다 틀어놓아보았지만 습도가 높은 반지하방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열대야가 심한 밤이면 우리는 돗자리를 들고 한강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한강공원에는 당시 유행하는 스타일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이 당대 유행하는 견종들을 산책시키고 있었고, 우리는 너무 말랐거나, 너무 뚱뚱하거나 아니면 눈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 같은 모습의 개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웃기게 생긴 개를 기르자.


그래. 너는 취직하고 나는 데뷔해서 아파트도 사고, 에어컨도 달고, 개도 기르자.


고양이도 길러야 해. 고양이가 바퀴벌레를 잘 잡아준대.


그래. 그러자.


우리가 손을 잡고 자지 않은 게 언제부터인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재밌는 얘기를 나누지 않았고, 이불을 덮자마자 코를 골며 자기 바빴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어버렸고, 문득 그것을 깨달았을 땐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변해버린 뒤였다. 그 방에 사는 동안 S의 필모그래피는 하나도 추가되지 않았고, S와 똑같은 이름의 가수가 데뷔한 뒤로는 검색엔진에서 S의 사진을 찾기조차 힘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S가 압구정동에 사는 이모의 아파트로 들어갈 것이라고, 내게 단호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함께 모았던 적금과 자신 몫의 보증금을 돌려받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번 결정한 것을 절대 되돌리지 않는 S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돈을 내주었다. 마지막으로 S와 함께 그 방에 누웠던 날, S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신사동의 한 대형 치과에서 막 라미네이트 수술을 받고 온 터였고, 입술과 잇몸뿐만 아니라 뺨까지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 S의 얼굴에 얼음찜질을 해준 것은 나였다.


나는 반 동강난 보증금으로 한남동이 아닌 홍제동의 집을 구했다. 우리가 다녔던 대학은 이미 Y시로 이전해버렸고, S와 함께 살지 않을 거라면 굳이 한남동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을 빼던 날, 내 이십 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 같은 과장된 기분에 사로잡혀 조금 울적해지긴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나의 새로운 원룸은 지층이 아닌 삼층이었고 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더이상 방에서 쿰쿰한 냄새가 풍기지 않았고 이상한 피부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며 벌레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게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음에도 나는 자주 잠을 설쳤고, 아무것도 나지 않은 깨끗한 피부를 벅벅 긁곤 했다. 그러다 누구도 내게 긁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멍하게 누워 있는 날들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S는 하얗다못해 푸른빛을 띠는 인위적인 여덟 개의 치아로 드라마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며, 조회 수가 낮은 웹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한 것 말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는 간헐적으로 연락을 하며 그보다 더 드문 빈도로 만났다. 누구도 이별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으나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나도 S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달 뒤 입대 영장을 받은 나는 연신내의 원룸을 정리하고 입대했으며, 이병 휴가를 나와 S에게 전화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로부터 사흘 뒤 나는 영내에서 자살 소동을 벌였고, 국군병원 폐쇄 병동에 두 달 동안 입원해 있었으며, 사 개월 뒤 의병제대 판정을 받았다. 다시 사회로 나섰을 땐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버렸고, S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대학 동창으로부터 S가 배우를 그만두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한 멀티플렉스 영화 체인의 직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고 우연이라도 S와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후로 나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고 더이상 무의미한 자살 시도는 하지 않게 되었으며 세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끝낸 후 서른두 살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동안 S가 발탁될 뻔했던 아이돌 그룹은 해체해 공중분해되었으며, 우리가 다녔던 대학 부지에는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일상 속에서, 마음속에서 S의 지분은 점점 줄어들었고 언제부터인가 좀처럼 S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S의 특징이었던 하얗고 뾰족한 얼굴과, 길쭉한 팔, 저음의 목소리마저도 감각이 아닌 관념으로 남아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이따금 한남동을, 한남오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내 얼굴을 짚어주었던 S의 차갑고 부드러웠던 손의 감촉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감각의 거리로 말미암아 한때는 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완벽하게 다 흩어져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박상영

1988년 대구 출생.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손가락이 보라색이 될 때까지 냉동 블루베리를 집어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성 비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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