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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May 25. 2018

문은 조금 열어둬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팔 년 만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파란 철문을 직접 열어주었던 건 아버지인 황이었다. 평일 한낮이었고 막 노곤하게 잠이 몰려오던 참이었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문밖을 비추는 흑백화면이 켜졌다. 얼마간 화면을 지켜보던 황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삼십 년 전 자신의 얼굴이 저랬었던 것 같다고 황은 생각했다. 황은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함께 늙어버린 가죽 소파와 이가 나간 화분, 모서리가 반들반들하게 마모된 탁자. 아들이 태어나고 지금껏 한 번의 이사 없이 묵묵하게 한남동 주택가를 지켜온 파란 철문 집. 눈꺼풀을 끔벅거리고 다시 보아도 변함없는 그 장소였다.

화면에 비친 남자의 턱 주변에는 미처 깎지 못한 수염이 거뭇하게 감싸고 있었다. 황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나 황의 턱은 매끈하기만 했다. 그제야 황은 화면 속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꼭 닮은 아들이란 걸 깨달았다.


황은 지난 팔 년간 아들의 미래를 상상했다. 어엿한 어른의 얼굴을 지니게 됐을 아들을. 팔 년 전 아들이 두고 나간 자필 편지를 천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었다. 편지를 다시 꺼내어 읽을 때마다 황은 아들을 비올라 교습 대신 글씨 교정 학원에 보내지 않은 걸 후회했다. 황은 잦게 후회하는 성격이었고 그건 사는 내내 아내를 지겹게 했다. 땅값이 오른 아랫동네로 이사 가지 않은 걸 후회했고, 먼저 은퇴한 동료의 경비원 제의를 단박에 거절했던 것을, 아들을 잃고 상심에 젖은 아내가 산악회를 들겠다고 할 때 구태여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살면서 치른 크고 작은 결정들은 번번이 황을 주눅들고 서글프게 만들었다. 늙더니 청승만 짙어졌다고 아내는 타박했다. 너도 늙더니 핀잔만 심해진다고, 말주변이 없어 부끄러움에 늘 두 볼이 붉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됐냐고, 황은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그러모아 한숨으로 내뱉었다. 그 때문인지 집안 공기는 언제나 눅눅했고 아무리 광을 내며 집안을 쓸고 닦아도 쿰쿰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후회투성이인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황은 아들을 낳은 것만큼은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자의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결과였지만). 황과 아내에게는 갓 태어난 아들을 온종일 쳐다보는 것만으로 충만했던 시기가 있었다. 4.2kg의 우량아로 태어난 아들은 짱구처럼 튀어나온 이마나, 깊숙이 패인 보조개며 황의 특징을 그대로 빼다박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아들의 얼굴은 경이로웠다. 황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꽉 움켜쥐는 아들을 보면서 이렇게 조그마한 게 사람일 수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이 조그마한 게 커서 언젠가는 내 몸집을 따라잡고 어깨를 맞부딪치는 날이 올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결혼하고 육 년 만에 생긴 자식이었으므로 아들은 더없이 귀했다. 세계를 판별하는 문자를 음절대로 또박또박 발음하고, 뛰다가 멈칫 서서는 다시 황에게로 달려와 와락 안기던 아들을 보면서 황은 그때껏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을 마주했다. 그건 찬란함이었다. 황은 미래에 이보다 더 눈부시고 빛나는 순간이 있을 거라는 오만 따위는 부리지 않았다. 아들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그저 겸허해졌다. 그런 아들이었다.


팔 년 만에 본 아들의 팔목은 육십 대인 자신보다 더 가늘었다. 때꾼한 얼굴 표면에는 가뭄처럼 주름이 번져 있었다. 아들은 땅바닥에 고갤 처박고는 말이 없었다. 짝도 안 맞은 슬리퍼를 신은 채 마당을 뛰쳐나온 황 역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들은 파란 철문을 사이에 두고 얼마간 서 있었다.


아들은 아팠다. 아파서 되돌아왔다. 실패를 해서 아프게 된 건지 병약해진 틈을 타 모든 걸 실패했다고 여기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의 입에서는 실패라는 단어가 꽤나 자주 흘러나왔다. 곧 죽어도 음악을 할 거라고 핏대를 세우고 반항하던 아들은 이제 색 바랜 이불보 속에 누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암 치료를 위해 입원하던 날, 병원 이름이 새겨진 환자복으로 아들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황은 처음으로 울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가능한 일이긴 하냐고. 지난 팔 년간 아들의 생일 주기가 되면 황과 아내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어쩔 땐 부부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마저 힘들었다. 갑자기 사라진 아들에 대한 걱정과 배신감은 애써 평온하려는 마음을 자꾸 흩트려놓곤 했다. 아내가 맥을 못 추릴 만큼 울기도 했다. 그때마다 황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간병인 의자에 앉아 잠든 아들을 바라보면서는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게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비어져나왔다. 가장 찬란하게 빛났을 아들의 이십 대. 그 시간들은 고이 접혀 있었다. 황은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들은 실패라고 단언했지만,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전력투구했을 그 시간들을.


그 시간들이 끝내 봉인된 채로, 아들은 죽었다.


마당을 가꾸는 일도 노부부에게는 힘에 부쳤고, 더이상 아들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졌으므로 아내는 인근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녔다. 황은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아내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전국으로 산악회 모임을 다녔다. 삼 일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황은 오래된 집에서 홀로 정물처럼 종일 앉거나 누워 있었다. 피곤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잠도 자주 깼다.


여느 때와 같이 오래된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평일 한낮이었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흑백 화면이 켜졌다. 모르는 얼굴 둘이 집 앞을 서성였다.


누구십니까. 황이 말했다. 그러자 화면 속 둘이 머뭇거렸다. 전도하러 다니는 중년 여자들처럼은 안 보였으므로 황은 다시 물었다. 앳된 얼굴의 여자 하나가 저기…… 하며 말끝을 흐렸다. 황은 마당을 가로질러 직접 철문을 열었다. 대학 신입생처럼 보이는 남녀가 황에게 대뜸 인사를 하며 말했다. 주변을 다 둘러봤는데 파란 철문 집은 여기밖에 없더라고요.


그들은 ‘희귀 음악 감상회’라는 소모임의 회원들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노래도 있었나 싶은 곡들을 수집해 함께 듣는 모임이었다. 그들은 음감회에서 처음 아들의 음반을 듣고 팬이 되었다고 말했다. 아들의 음반에는 총 세 곡이 들어있는데, 그중 <한남동 파란 철문>이라는 노래가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진짜 있네요. 대박 신기. 그들은 사 년 전에 싱글 앨범 한 장을 발매하고 사라진 아들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고는 힘들겠지만 계속해달라고, 아들에게 꼭 전해달라며 덧붙였다. 그래도 듣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들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도록 황은 파란 철문을 닫지 못했다. 아들의 이름을 새긴 명패라도 만들어야 할까. 황은 아내에게 당분간 이사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지. 황은 아주 약간의 틈을 벌려둔 채 문을 열어두었다. 일단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차현지

1987년 서울 출생. 201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자주 산책하며 허튼 상상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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