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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May 16. 2018

옥상 수영장

젊은 작가가 쓰는 한남동에 대한 짧은 픽션 - 한남동 이야기

그해 봄, 여름 유진은 자주 걸었다.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하루에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걷기도 했다.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르까프 운동화를 신고 선캡을 쓰고 이리저리로 걸어다녔다. 술에 취하면 술을 깬다는 이유로, 밥을 먹으면 먹은 걸 소화시킨다는 이유로, 피곤하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유진은 걷기 시작했다.


시작은 이랬다. 동아리방 창밖으로 어떤 구조물이 보였다. 저게 뭐예요? 묻는 유진을 보고 선배들은 웃었다. 저게 남산타워라는 거란다. 유진은 선배들이 웃든 말든 창밖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서울에 있구나. 타워는 가까워 보였다.


유진은 타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남산 입구까지는 걸어서 세 시간쯤 걸렸다. 남산 입구에서 타워 정상까지는 한 시간쯤 걸려 도착하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둠 속, 반짝이는 도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게 다 야근하는 사람들이 켜놓은 사무실 불빛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때였으니까. 서울은 예쁜 도시네. 유진은 남산 성벽에 기대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봤다.

유진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사귀었던 동우에게 문자로 차였다. 뭐랄까, 너무 늦은 이별이라는 느낌이었다. 동우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유진을 보는 동우의 얼굴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둘은 철산역 근처 용우동에서 우동과 유부초밥을 나눠 먹었다. 밥을 먹는 내내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말도 없었고,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말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둘은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유진이 먼저 버스를 타고 정류장 쪽을 보니 동우는 이미 등을 돌리고 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유진은 서운하지 않았고, 서운하지도 않은 자기 마음이 낯설어서 고개를 숙였다.


동우에게 차였을 때 유진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자려고 자리에 누우니 허전해졌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단과 학원에서 만난 동우와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갑자기 키가 쑥 자랐던 동우의 모습과 겨울방학 보충수업 때 학교 운동장에서 눈싸움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애칭과 농담 같은 것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연인이 헤어지면 적어도 한쪽이 관계를 이어가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 관계에서는 누구도 그런 간절함이 없었다. 자신에게 계속해서 사랑할 능력이 있는 것인지,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유진은 자리에 누워 곰곰 생각해봤다. 그러자 자신과 동우가 정말 사랑을 나누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남산을 다녀온 이후 유진은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동대문까지만 걸어보자, 결심하고 걷다보면 광화문을 지나 신촌이었고 신당동에서 친구들과 놀다 헤어져 정신을 차려보면 한강을 따라 여의도까지 걷고 있었다. 끌리는 대로 걷다보면 작은 동네도 나오고 산도 나오고 심지어 계곡도 나오는 곳이 서울이었다. 튼튼한 우비와 장화를 사서 비가 내리치는 날에도 걸었다.


이호연이 한남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을 듣고 유진은 귀를 기울였다. 이호연은 초급 일본어 수업시간의 짝이었다.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제2외국어 수업을 이수해야 했는데, 일본어를 전공한 외고 출신이 수강생 열 명 중 대다수였다. 히라가나 가타카나도 모르는 수강생은 유진과 이호연 단둘뿐이었다. 다이얼로그를 읽을 때 교수는 꼭 유진과 이호연을 짝으로 묶어 소리내어 읽게 했다. 한 음절, 한 음절을 겨우겨우 읽는 유진과 이호연의 모습은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그 이후로 둘은 매점에서 같이 음료수도 마시고 빵도 먹는 사이가 됐다.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 나니누네노…… 함께 독경을 읽듯 가타카나 표를 읽기도 했다.


자기가 일하는 호텔의 옥상 수영장을 개장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호연은 말했다. 일본어 기말고사를 보고 같이 밥을 먹던 날 그는 옥상 수영장 쿠폰을 건넸다. 수영을 못해도 선베드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라고. 학관에서 천원짜리 라면을 먹을지, 천오백원짜리 떡만두라면을 먹을지 갈등하던 그때, 한남동 호텔 수영장, 선베드라는 단어는 유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뜻 없이 서울역까지 걸어갔던 날, 유진은 지갑 한구석에 소중하게 보관했던 수영장 쿠폰을 떠올렸다. 후암동을 지나 슬슬 걸어가면 한남동이 나올 것이었다. 해는 졌지만 초여름의 열기에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하루종일 햇빛을 맞으며 걸어서인지 시원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유진은 이태원 종합상가 건물에 들어가서 수영복 하나를 큰맘먹고 샀다. 수영장 입장료가 무료이니 수영복을 산 건 사치가 아니며 수영복을 한번 사면 십 년은 입을 수 있다고 다짐한 후였다. 유진은 선캡을 벗어 가방에 넣고 A호텔 로비에 가서 쿠폰을 내밀었다.


“이거 내일 오픈인데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입구에 이호연이 서 있었다.


“내일부터래요.” 유진이 말했다.


“구경이라도 해요.” 이호연이 말했다.


둘은 옥상으로 갔다. 은은한 조명이 사각의 풀장을 비췄다. 흰 플라스틱 선베드가 디귿자 모양으로 풀장을 둘러싸고 있었고 커다란 파라솔은 모두 접혀 있었다.


“제 친구예요!” 이호연이 선베드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자 둘이 기다란 빗자루를 세워놓고 선베드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호연과 유진은 그녀들 맞은편 선베드에 앉아 풀장을 바라봤다. 이호연의 목덜미는 검붉은색이었다. 겨울과 봄 내내 닫혀 있던 풀장 문을 열고 다섯 명이 같이 타일 청소를 했다고 했다. 풀장의 물이 넘쳐 배수로로 꾸르륵 꾸르륵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서 염소 냄새가 났다.


이호연은 풀장으로 다가가 다리를 담그고 앉아 유진에게 손짓했다. 유진도 풀장에 다리를 담갔다. 차가운 물이어서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맞은편에 있던 여자들도 퇴근을 했다. 퇴근을 하며 조명을 다 꺼버려서 조명이라고는 한쪽 구석에 켜둔 랜턴밖에 없었다. 이호연은 옷을 벗고 수영복 차림으로 물에 들어갔다. 몰래 하는 수영이어서 첨벙거리지 않고 조용히 잠영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지만 어디에도 달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두운 곳에 앉아 유진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울어봤던 것이 언제였는지 어림해봤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진의 친구들은 종종 유진을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하곤 했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남들처럼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끔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고, 가끔은 머릿속이 따끔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음이란 건 하도 걸어 물집투성이가 된 발바닥 같았다. 예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아니라.


이호연씨. 유진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봤다. 이호연은 듣지 못한 듯이 계속 수영을 했다.


이호연씨. 조금더 크게 불러봤다. 그제야 그도 유진에게 천천히 헤엄쳐 왔다. 그가 헤엄칠 때마다 수영장 물이 유진 쪽으로 넘쳤다. 한 뼘 가까이 다가온 이호연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유진을 향해 웃었다. 유진도 그와 함께 웃었다. 그곳에 그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었다.


최은영

1984년 경기 광명 출생. 지은 책으로 『쇼코의 미소』가 있다. 혼자 걷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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