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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Sep 28. 2018

친애하는 괴물 여러분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그리고 <오피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7)를 보다 보면 정말로 무서운 건 좀비가 아니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비의 출현처럼 사방팔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배우와 스태프들은 모두 패닉하지만,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감독 히구라시(하마츠 타카유키)는 카메라를 멈추지 못한다. “계속 해! 이런 게 진짜 공포지! 이게 진짜 감정이야!”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 세운 걸까? 되도록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는 채로 관람하는 게 좋은 작품이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히구라시가 이렇게 이를 악물고 카메라를 돌리는 건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쓰러져 나가고 세트장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도, 일을 잘 해서 좋은 결과를 내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열망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희열과 광기로 눈빛이 형형해 진 히구라시를 보며 나는 새삼 내 마감 스케쥴을 살펴보았다. 랩톱 앞에 앉아서 하염없이 타이핑을 하고 있을 때 내 눈빛도 저렇게 반절쯤 미쳐 있을까. 하긴, 나도 굳이 경중을 달아보자면 좀비보다는 마감 독촉 전화가 더 무섭다.


귀신이나 좀비, 광기 어린 살인마보다 우리의 일상이 더 무섭다는 식의 접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겟 아웃>(2017)도 공포의 실체가 드러나는 후반부보다 일상 속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미세한 인종차별의 연쇄가 쌓아 올린 공포가 더 소름 끼치고, <부산행>(2016)도 달려드는 좀비 떼보다 제 칸의 생존만을 도모하기 위해 남들이야 죽어 나가든 말든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쪽을 택하는 용석(김의성)이 더 징그러워 보인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의 인식 밖의 존재가 무서운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말로 설득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상대임에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를 접할 때 밀려오는 공포는 그 차원이 다르다. 분명 말이 통해야 하는데 통하지 않는 상황이 주는 숨 막히는 당혹감이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그 당혹감을 유머와 쾌감의 동력으로 삼아 질주하는 작품이지만, 생각해보면 같은 내용으로 웃음기를 싹 뺀 정통 호러물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보며 웃음기 하나 없는 스릴러 <오피스>(2014)를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망치로 제 가족을 다 때려죽이고 잠적한 김병욱 과장(배성우)의 행방을 둘러싸고, 제일F&B 영업2팀 사람들은 불안함에 웅성거린다. 그 순박한 김과장이 온 가족을 죽였다고? 혹시 직장 내 왕따를 당한 것 때문에 미쳐 버린 걸까? 심지어 CCTV에 김과장이 회사로 돌아오는 장면은 찍혀 있는데, 회사에서 나간 장면은 없다. 툭하면 김과장을 갈궜던 부장(김의성), 융통성 없는 과장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대놓고 떠들어 댔던 부하 직원들 모두 김과장이 회사 어딘가 숨어있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한 사람, 인턴 이미례씨(고아성) 빼고. 물론 미례씨라고 겁이 안 난 건 아니다. 하지만 당장 미례씨에겐 더 큰 공포가 있다. 인턴 기간은 끝나 가는데, 정규직 전환이 무사히 되어야 하는데. 선배들은 충고랍시고 융통성이 없네 표정이 음침하네 같은 험담이나 해대고, 부장은 또 어디서 나보다 조건 좋은 애를 데려와 인턴으로 꽂았다. 난 회사에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정직원이 되면 선배들도 눈치를 좀 덜 줄까?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우리는 괴물이 되고, 멀쩡하게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밀려드는 좀비나 회사 어딘가 숨어있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보다, 이 와중에도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고 울부짖는 감독이 더 무섭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동안에도 보고서에 첨부해야 할 자료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는 대리가 더 무서운 법이다. 주변이 피바다가 되도록 카메라를 멈출 수 없고 보고서 작성을 멈출 수 없고 타이핑을 멈출 수 없는 친애하는 괴물 여러분, 문득 주변이 싸하다 싶으면 우리 모두 잠시 멈추고 거울을 보도록 하자. 극장을 나서는 순간 영화의 세계는 끝나지만, 우리가 괴물로 돌변해 만드는 일상의 공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일 테니까.


<오피스>(2015)
감독 홍원찬
주연 고아성 박성웅
시놉시스
어느 날 한 가족의 가장이자 착실한 회사원인 김병국 과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사라졌다. 이에 형사 종훈은 그의 회사 동료들을 상대로 수사를 시작하지만 모두들 말을 아끼고, 특히 김과장과 사이가 좋았다는 이미례 인턴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다. 게다가 종훈은 김과장이 사건 직후 회사에 들어온 CCTV 화면을 확보하지만, 그가 회사를 떠난 화면은 어디에도 없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한편, 김과장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료들은 불안에 떠는 가운데, 이들에게 의문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공부는 안 하고 TV만 보니 커서 뭐가 될까"라는 주변의 걱정에 인생을 걸고 허덕이며 답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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