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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윤종신 Dec 14. 2018

음악평론가를 위한 노래

‘ize’ 편집장 강명석의 노래 | 윤상 - 배반

내 일 중 하나는 지금처럼 돈을 받고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오랫동안 ‘인생의 노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늘 새로운 노래들을 듣고 평하는데, 어느 시점의 한 곡을 ‘인생의 노래’로 삼을 수는 없었다. 언제나 나오는 좋은 곡들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취향과 과거의 추억 등이 강하게 반영된 좋았던 옛 노래의 기준만을 가져갈 수는 없다. 방탄소년단의 ‘DNA’나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있어 이 시대의 정서와 음악을 만들고 퍼뜨리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지 않을 수는 없고,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좋은 음악에 대한 기준은 바뀌기 마련이다.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는 세기의 명곡이지만, 음악을 듣고 해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지난 세기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렇게 늘 업데이트되는 좋은 노래의 기준 속에서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어 가며 결국 내가 느끼는 아름다운 노래가 더 많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이 일을 하는 이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인생의 노래’를 하나 꼽을 수 있다. 윤상의 ‘배반’이다.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배반’보다 더 아름다운 곡은 있겠지만, 단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노래는 감히 ‘배반’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노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전달하는 대신, 노래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따르기를 요구한다. 노래 속의 윤상은 ‘빗나간 오해 속에 갇혀 끝도 없는 한숨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은 현재의 감정이 아닌 과거의 회상이다. 그때는 ‘아주 먼 곳인 줄 알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 시절은 ‘끝내 잊어버릴 수 없는 빛바랜 기억들만을 조롱하듯 남겨둔 채’ 사라졌다. 이미 잡을 수 없는 순간은 안타까우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회상밖에 없고, 회상은 ‘처음부터 내겐 없었지 높이 오를 수 있는 날개’라는 성찰로 이어진다.

현재의 나를 표현하는 대신 그런 나를 만들어온 과거에 대한 사색의 시간. 당신이 어떤 감정에 있든, ‘배반’을 재생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시작부터 마치 방에 실제로 있는 시계처럼 생생한 초침 소리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신시사이저는 이 노래를 듣는 공간을 생각의 우주로 만든다. 오직 시간만이 흐르는 무한한 공간 안에서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이 흘러 다닌다. ‘언제 이토록 서로를 미워하게 된 거야’라고 할 만큼 인간의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이내 모든 소리들은 바스러지듯 사라진다. 인간의 감정이 우주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표현되고 사라지는 과정. ‘배반’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인간의 정신 활동에 관한 타협할 수 없는 세계와 기준을 만들어, 곡을 들으면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점에서 내게 ‘배반’은 안드라스 쉬프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 안젤라 휴이트가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과 같은 의미다. 음악에 관한, 또는 음악을 듣는 것에 관한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이 음악들은 결국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사색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다만 슬프게도, ‘배반’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 노래가 발표된 그때부터 빠져들 수는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듣는 이에게 노래가 전달하는 감상을 정확하게 요구하는 이 노래는, 듣는 이가 감상해야 할 자세마저 요구한다. 초침 소리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신시사이저, 매우 무겁고 단단한 저음의 비트,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 입체적인 소리들이 한데 섞여 우주를 만드는 이 곡은, 매우 통제된 감상 환경을 요구한다. 스마트 폰이나 일반적인 블루투스 스피커는 물론, 이어폰이나 헤드폰도 곡이 표현하는 가상의 공간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최소한 소리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하이파이 시스템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이 곡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도 집을 사서 방 하나를 마스터링 스튜디오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도록 룸 튜닝을 하고, 시스템을 정착시킨 다음부터였다. 다시 말하면, 내게 ‘배반’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만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든 방에서,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앉아, 노래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시공간에 빠져 끝나지 않는 생각에 잠기는 행위다. 진정으로, 음악 평론가를 위한 음악 아닌가.


강명석

문화 웹 매거진 ‘ize’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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