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에 대하여

by 여르믄



한별이와 지내면서 새삼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아주 오래전 친구였고, 잊혀지는 데도 오래 걸렸고, 잊고 산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한번 생각이 나니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버튼을 눌러버린 것처럼 친구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항상 가슴속에만 담고 있던 친구인데 한번은 풀어내고 싶었고 그래야 될 것 같다.

그 영혼이 주는 반짝임이 꺼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글로든 말로든 풀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친구를 어떤 무엇으로도 풀어내기에는 내 역량이 부족함을 느낀다.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 민과 나는 학교 대표로 각종 백일장에 참가하면서 친해졌다.

민은 정신세계가 또래와 많이 달랐고 독특한 몽상가였다.

예쁘고 밝았으나 친구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했고 어쩌다 무리 속에 있으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데미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들을 그 친구를 통해서 알았으나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은 자신의 보물 습작노트를 나한테만 보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민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범하고 원만한 편이어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떡볶이 먹는 게 즐거운 중학생이었다.

민은 교실 뒷문으로 나를 불러내어 편지를 건네곤 했다.

밤새 책을 읽으며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편지에 담고 있었다.

담장에 넝쿨장미꽃이 피는 계절에는 아침마다 장미를 꺾어다 주었다.

민에게 받은 편지는 라면 박스 몇 개가 차고 넘칠 정도였다.

그 친구는 아낌없이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나는 비밀의 집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경청했다.

그 세계는 내가 아는 세상과는 너무 달라서 그저 민이 이끄는 대로 보고 들으며 어렴풋이 따라갈 수 있을 뿐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무척 좋아했던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의 문장들이다.

그녀는 ‘아름다움과 사랑, 진실한 우정, 참된 용기’ 네 가지 덕목을 매 편지마다 쓰며 추앙했지만 내게는 머릿속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학교 대표로 선발되어 함께 백일장에 나갔다.

그런 연유로 나는 민과 친하면서도 경쟁심을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있었는데, 민은 대회에서 열심한 모습도 수상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떤 대회에서는 주어진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글을 쓰거나 아예 쓰지도 않고 놀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런데 나의 그 경쟁심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계기가 있었다.

문예부 선생님이 우리 둘에게 <저축>에 관한 글을 써오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 <저축>을 주제로 글을 써서 서로 돌려보았다.

나는 그때까지 저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저축이라는 건 아껴서 한푼두푼 저금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전부였다.

그래서 늘 절약의 희생물인 그 죄없는 콩나물 값을 깎은 돈으로 저금을 한다는 신파조의 글밖에 쓸 수가 없었다.

반면 민의 글은 그녀만이 쓸 수 있는 글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좋아한다.

아버지가 출근할 때마다 슬퍼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매일 십원짜리 동전을 하나씩 준다.

나는 대청마루에서 놀다가 나무판자 사이 틈을 발견했다.

그 틈새로 십원짜리 동전을 떨어뜨린다.

동전이 대청마루 밑에 쌓여간다.

집은 거대한 저금통이 된다.‘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한대 크게 맞은 것 같았다.

오롯이 자기 것으로 꽉 찬 민이라는 존재가 눈부시게 느껴졌고 감히 쫓아갈 수 없겠다는 열패감이 들었다.

당연히 민은 그 글로 상을 받았지만 그때부터는 수상도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민은 그렇게 좋아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병이 생긴 듯했다.

섭식장애가 생겨서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어느 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우리집에 놀러왔다.

살만 빠진 게 아니라 머리카락도 빠져 숱이 듬성듬성했고 이빨까지 빠지는 등 미라같이 변한 모습에 나는 어쩔줄 몰랐으나 민은 특유의 거침없이 발랄하고 천진한 성격 그대로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원하던 미용기술과 그림을 배우러 다닌다고 했다.

"요즘은 파마를 배우고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서 서로 파마를 해주거든. 근데 내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내 짝궁은 가발로 연습해. 나중에 네 머리도 내가 다 해줄게."

그리고 곱게 포장한 액자를 선물이라며 건넸다.

"자화상이야. 너 주려고 열심히 그렸어."

수채화로 그린 민의 얼굴이었다.

측면으로 얼굴을 돌린 민의 시선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듯했다.

먹을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나서 못 먹는데 어머니가 모든 방법을 다 써서 억지로 먹이려 드니 관계가 나빠졌다고 했다.

병원 치료는 물론이고 스님의 퇴마치료까지 받았던 얘기를 담담하게 했다.

그 뒤 민의 집에 놀러갔을 때 민은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아가며 내게 고구마튀김을 해주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고 그녀가 기어이 별이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민이 세상과 소통하는 단 하나의 문이 나였는데 나는 그녀에게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민의 잔상은 아주 특별하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특별함은 바래지 않고 여전히 빛난다.


한별에게서 느껴지는 순도높은 순수함과 암호와도 같은 언행, 사회에 부적응하는 모습들이 민을 다시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가끔 이들이야말로 외계인이 아닐까, 혹은 먼 미래이거나 먼 과거에서 온 사람들, 궤도에서 이탈하여 이 지구에 떨어진 길잃은 영혼들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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