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리(누나/19세)와 한주(형/12세)와 한별(10세)
“한주야! 안녕!”
문을 열어준 한주에게 나는 톤업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원래 내 목소리는 저음에 가까운데 아이들만 보면 톤이 올라간다.
가끔 혀짦은 소리가 나올 때도 있다.
아이들과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내게 이런 면이 있구나 싶고 새삼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방학중에는 아침마다 아직 늦잠에 잠겨있는 한별이네 집안을 내 목소리가 쨍하고 깨운다.
눈을 비비며 들어가던 한주가 황급히 뒤돌아서 나를 보더니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며 속삭였다.
“선생님, 조용해야 돼요. 누나 깬단 말이에요. 누나가 깨면 힘들어요.”
현관 가까운 곳에 누나 방이 있어서 한주는 까치발을 하며 거실로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 한리는 밤낮이 바뀌었는지 정오쯤 일어난다.
정오에 일어나 느지막이 밥을 차려먹고 부업을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하는 듯했다.
집안 분위기는 한별이 혼자일 때, 한주와 둘일 때, 삼남매가 다 있을 때 각각 다르다.
한별이는 나와 둘이 있을 때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인다.
밥을 먹고 30분 휴식시간을 보내고 학습지를 풀고 책을 읽고 독후활동을 한다.
이때는 제법 집중도 하고 스스로 책을 읽는다든지 문제를 푼다든지 하는 자발적인 활동도 일어난다.
한주와 같이 있을 때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
한주가 한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만 한별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고, 한주의 개입이 지나치다 싶으면 한별이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런 경우 한주가 주로 져주는 편이다.
문제는 군기반장 한리가 있을 때다.
한리는 동생들을 챙기고 집안 일을 한다.
“너 숙제 다했어?”
“쓰레기 재활용품 분리수거하고 와.”
“커튼 빨아야 하니까 니 방 커튼 다 떼놔.”
“어제 먹던 갈비 양념에 밥 좀 볶아 놔.”
한주는 누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7살 터울이란 나이 차이도 있지만 한리의 포스를 보면 말을 안 듣기 힘들다.
늘씬하고 비율이 좋아서 모델을 꿈꾸는 한리는 얼굴은 조막만한데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하게 큰 서구형 미인이다.
눈이 큰데다 꼬리 쪽이 위로 올라가있어서 무표정이어도 좀 사나워보이는데 성격도 야무지다.
아파트에 하자가 생겨서 전기 공사라든가 바닥보수 공사, 천장 누수문제 등 외부 사람들과 상대해가며 처리해야 하는 문제도 똑부러지게 해결해낸다.
조금이라도 대충 넘어가려는 게 보이면 얼마나 당차게 따지고 드는지 일하러 온 사람들은 계획에 없던 것들까지 봐주곤 했다.
때로는 그런 면이 지나쳐서 방안에서 듣고 있던 내가 괜히 민망해질 때도 있다.
엄마가 외국인으로 이국에서 혼자 가정을 꾸려나가니 맏이로서 그 부담을 같이 지려는 마음도 클 것이다.
언젠가 내가 한주가 참 잘 자랐다고 칭찬하자 한리는 “제가 키웠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한리는 한별도 목욕시키고 입히고 먹이고 학교생활을 챙기는 등 여느 엄마처럼 돌보고 있었다.
나도 얼굴 보기 힘든 한별이엄마보다 한리에게서 한별에 대해 필요한 얘기를 듣는 편이다.
한리에게는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가르쳐서 잘 키워야 된다는 의무감이 있는 듯하다.
초등4학년, 2학년 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긴다.
아이들은 당연히 어설프고 배울 것도 고칠 것도 많다.
한별이가 귀가하면
“손씻어.”
“옷 갈아입어.”
“똑바로 앉아.”
“핸드폰 하지 마.”
“라면은 안돼.”
“귀신 나오는 거(영상) 보지 마.”
등등 지침이 계속 나온다.
한리의 잔소리가 좀 심하다 싶으면 한별은 이상행동이 점점더 심해진다.
계속 누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아무말이 마구 쏟아지고 극도로 산만해진다.
그러면 또 누나는 야단치게 된다.
“말하지 마!”
“가만 있지 못해!”
한리의 육아법을 나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한리에게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긴 하나 지나칠 때는 갈등이 생긴다.
엄하게 대할 때 한별이 증상이 심해지는 걸 한리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별이가 이나마 어른의 말을 듣는 것도 그런 육아법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한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들 것이다.
가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떼쓰고 울고 고집부리기는 하지만 길게 가지는 않는다.
내가 한별이와 학습지를 풀거나 책을 읽을 때 한별이가 하기 싫어 몸을 비비꼬거나 딴짓을 할 때가 있는데 지켜보던 한주가 냅다 야단을 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참 난감하다.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그러는 한주의 마음을 잘 알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럴 때 한별이는 조금 기다려주기만 해도 대부분은 해결된다.
컨디션에 따라 집중도도 날마다 달라서 어떤 날은 더 잘하고 또 다른 날은 못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번 그런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리가 항상 엄하게 구는 것은 아니다.
한별의 볼을 살짝 꼬집거나 두 손으로 감싸며 다정하게 부를 때는 딴 사람이다.
“애기! 오늘 학교에서 열심히 했어?”
“애기! 밥 먹었어?”
야단칠 때는 엄하지만 품어줄 때는 엄마처럼 따뜻하다.
한리는 한주와 영락없는 남매사이인데 한별과는 모자관계 같다.
한주는 그런 누나 뒷담화를 신랄하게 하곤 했다.
“지는 공부도 안하면서 나보고만 하래요.”
“지는 핸드폰을 끼고 살면서 나보고는 하지 말래요.”
“지는 라면 먹으면서 우리는 못 먹게 해요.”
가끔 삼인삼색 삼남매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 느껴질 때 나는 한별을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써놓기는 했지만 사실 저변에 깔린 이들 삼남매의 우의는 아주 좋은 편이다.
앞서도 밝혔지만 아버지가 다 다른 삼남매다.
사실 상기할 필요도 없이 이들 사이는 일말의 스스럼도 없지만.
어찌됐든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대견해서 나도 모르게 부러움 섞인 혼잣말이 나오기도 한다.
"뉘집 애들인지 참 잘 자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