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산 한양도성 순성길의 산들(2023년 10월)
에덴동산에는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선과 악의 지혜를 알게 되는 나무와 영원한 삶을 주는 생명나무이다.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뭔가를 아는 눈을 뜨자 하느님은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라고 하시며 그들을 내쫓고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기 3장 22-24)
하느님이 지혜 나무 열매를 먹은 인간이 신과 비슷한 위치에 오른 것을 용서하지 못하셨던 것처럼, 조선의 건국자들은 백성이 지혜로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양 도성을 잇는 사방의 문에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들어있는데 지(智)가 들어간 홍지문(弘智門)은 후대(숙종)에 세워졌고 당대에는 숙청문(肅淸門,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을 세웠다. 후에 숙정문이 되었고 ‘꾀(靖)를 엄격하게 다스리다(肅)’라는 뜻의 북대문에는 지배자들이 궁극의 지혜를 얻는 피지배자를 두려워한다는 보편적인 갑을 구조가 드러난다. 한양 도성길에 있는 4개의 문 중에서 유일하게 숲속에 있는 숙정문 앞에서 우리는 백성이 똑똑하면 다스리기 어렵다는 옛 통치자의 논리에 살짝 분노했다. 이곳은 음기가 강해서 정월대보름 전, 여자가 세 번 다녀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몰래 드나드는 남녀가 많아지면서 풍기가 문란해지자 숙정문은 닫았다가 음기가 필요한 가뭄에만 열었다고 한다.
혜화문에서 시작하는 도성길을 따라 숙정문, 창의문, 돈의문터, 숭례문, 광희문, 흥인지문을 지나 다시 혜화문에 도착하는 한양 도성길을 하루에 완주했다. 장장 18.6km. 혜화문에서 시작할 때 까마득하게 보였던 끝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다리가 얼얼하고 기운이 빠져도 뿌듯함으로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다. 도성길은 깨끗하고 편안하게 단장되어 걷기 편하고 도시의 산은 경사가 완만하다. 시내의 높은 건물 사이에서 옛 도성의 흔적이나 길바닥에 한양 도성 길임을 알리는 인장을 찾는 재미가 있다. 한낮의 볕은 따가워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길가와 산에는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 같은 가을꽃이 한창이었다. 친척관계인 세 종류의 국화꽃은 비슷하게 생겼는데 벌개미취의 이파리에는 벌처럼 뾰족한 침이 나 있다고 친구가 가르쳐 주었다. 인왕산 공원에 잔뜩 피어 있는 금잔화를 손으로 쓸어 향기를 맡았더니 아린 근육통을 잊게 할 만큼 꽃향기가 진했다.
도심을 둘러싼 산인 낙산(약 125m), 백악산(약 342m), 인왕산(약 338m), 남산(약 262m)을 차례로 올랐다. 도시는 명절의 달콤한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어릴 적 살았던 동네를 지나면서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백악산에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빽빽하게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인왕산 정상에는 휴일을 맞아 등산을 온 외국 젊은이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우리는 충정로의 마천루가 드리우는 그림자로 어둑한 골목길도 걸었다. 남대문 시장쯤 왔을 때 점심시간이 되어 갈치조림을 먹었다. 반찬으로 주는 뼈째 먹는 갈치튀김이 입에 맞아 소주를 몇 잔 마셨다. 사카린의 단맛이 짭짤한 갈치와 잘 어울려 술이 술술 들어갔다.
취기에 다리가 무거웠지만, 짐을 들어주는 친구도 있고 완주를 향해 분발하라는 친구의 독촉도 있어 무사히 혜화문으로 돌아왔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같이 뱅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서울 한 바퀴 여정을 끝내니 상장과 배지를 주었다. 완주를 몇 번씩 해서 금속 배지를 획득한 친구도 있었다. 오랜만에 상장을 받고 만족함이 차올라서 다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인생의 길을 완주해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상장을 받을 수 있을까.
성리학에 대한 믿음으로 성곽의 문 이름을 짓고 그 뜻이 담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조선 건국자들. 세상은 그들의 로고스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성문에 이름만 남았다. 도시를 지키고 왕권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세운 한양 도성은 이제 우리 모두를 위한 산책길로 이용한다. 어쩌면 그들이 내세운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 유교 정치사상은 실현된 것일지 모른다. 지혜와 지식을 언제 어디서나 얻는 백성이 천지인 것만 제외하고는.
한양 도성길은 하루에 완주할 필요는 없다. 며칠이 걸려도 인증 사진 찍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남기고 지도에 도장을 찍거나 인증을 한 어플을 보여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