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에서

75산 마니산 (2023년 9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른다.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 거의 동시대에 서로 교류하지 않았는데도 동서양 곳곳(인도, 이스라엘, 중국, 그리스)에서 인류는 새로운 사유를 시작했다. 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축의 시대’라고 했다. ‘공감’과 ‘자비’를 중요시하는 그들의 전통은 3대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2,284년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在世理化)라는 위대한 정신을 태동했다. 물론 삼국유사(1281)에 나온 이야기이니 연대가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도 축의 시대 이전부터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귀한 전통이 있었다.


치열하고 잔인한 전쟁과 살육으로 인류의 생존은 불투명했고, 자연은 너그럽기도 하지만 무자비할 때가 많았다.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하늘뿐이었다. 내면의 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축의 시대’ 이후에도 하늘에 대한 경배는 계속되었다. 우리 조상에게도 제의는 오래전부터 중요했다. 마니산에는 단군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돌의 제단이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참성단에서는 무수한 세월 속에 흘러간 간절한 기도가 담겨있다.

마니산(472.1m)은 강화도에 있는 고만고만한 산들 사이에서도 툭 튀어나온 배꼽 같아 멀리서도 눈에 띈다. 북쪽으로 500km 거리에는 백두산 천지가 있고, 남쪽으로 500km에는 한라산 백록담이 있으니, 몸의 정중앙에 있는 배꼽이라 이를 만하다. 어떤 풍수 전문가는 이 산이 전국에서 가장 기가 센 곳임을 증명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인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로 된 제단은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기단과 땅을 의미하는 사각형의 상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 틈 사이로 자라난 아담한 소사나무는 성전과 겨루지 않고 겸손한 모양으로 제단을 수호한다. 예전에는 물이 솟아났다는 우물은 뚜껑이 닫혀있어 흔적만 남았다. 이제는 등산객이 인증하거나 성화를 채취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되어버렸지만, 참성단은 오래전 우리의 단군 할아버지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스러운 석단(石壇)이었다.

민족의 성전이 있는 마니산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오를 가치가 있지만 쉽지는 않다. 우리는 함허동천에서 시작해 쭉 경사가 급한 오르막을 올라 암릉으로 이어진 능선을 조심조심 걸었다. 큰 바위 사이에 크레바스처럼 시커먼 구멍이 있고, 양옆으로는 낭떠러지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헬리패드와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화강암 바위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가면 참성단이 보인다. 그동안의 공사를 마치고 새로 단장한 성전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가슴이 확 트이는 서해 전망을 바라보았다. 올라오면서도 물이 빠진 갯벌과 몬드리안 추상화 같은 논, 지붕 색이 선명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보았다. 정말 강하게 흐르는 기를 받아서인지 별로 힘들지 않게 가장 먼저 올라왔다.

길이 헷갈려 ‘알바’를 하기도 하고, 무릎에 상처가 난 친구를 치료해 주느라 한발 늦은 친구들과 그늘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비 예보를 비웃듯 해가 났고, 습도를 머금은 공기가 끈적끈적해서 모두 비를 맞은 것처럼 땀을 흘렸다. 벼가 노랗게 익어 추수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여름의 미련이 츱츱하게 길어서 우리는 이 해의 더위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거꾸로 가면서 보는 조망이 궁금해서 거칠고 험한 능선 길을 다시 가는 하산을 택했다. 논과 밭, 새우 양식장, 갯벌에서 가을이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아스라이 섬을 품고 흐린 하늘과 경계가 없이 영원하게 펼쳐있었다. 어렵게 오른 산에서 조망을 오래 보면 산행의 기쁨이 그만큼 깊다.

특산물이 많은 강화의 한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고 20분은 꼭 움직여야 한다는 친구의 권유로 근처 논두렁, 밭두렁을 걸었다. 속이 탱탱하게 익은 벼가 겸손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무성한 콩밭에는 콩이 다닥다닥 숨어서 달려있었다. 우리는 마니산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을 살고, 인공의 기운에 압도당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제의는 비과학적이라 하고, 하늘의 움직임은 컴퓨터로 미리 안다. 하늘의 위엄은 사라진 것일까. 마니산은 변덕스러운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드센 기를 품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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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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