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bute to "Papyrus"

89산 북한산 족두리봉

1981년부터 대학입시에 ‘졸업 정원제’가 생겼다. 그때부터 입학생 수는 점점 늘어, 내가 입학할 때는 정원의 130% 정도를 뽑았다. 캠퍼스는 신입생으로 오글오글했다. 거의 오천 명에 이르는 동기들은 서로 얼굴을 익히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졸업한 지 이제 거의 40년이 지났다. 그 많은 새내기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학 동기회에 나오는 사람은 채 200명도 되지 않는다.

전체 동기회 산하에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 활동을 함께 배우고 즐기는 작은 모임들이 있다. 그중 독서토론 방(Papyrus)에서는 꽤 어려운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들과 나는 같은 캠퍼스에서 같은 시절을 보냈지만, 학생 때는 친구로 지낸 적이 없었다. 책 읽는 모임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면 선뜻 가겠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같은 책을 읽고 속내를 나누다 보면 생각과 신념이 발가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10년 가까이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제는 그들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혼자 읽기 버거운 길고 난해한 책들을 분야(문학, 예술,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별로 골라 두 달 동안 읽으면서, 중간중간 톡방에 소감을 남긴다. 발제자나 독서 내공이 깊은 친구들은 도움이 되는 자료나 연관 도서, 강의 영상을 함께 올려 준다. 혼자라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 생명·우주 과학이나 들뢰즈 철학 같은 책도, 친구들과 천천히 짚어 읽다 보면 처음에는 오리무중이던 내용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단순한 주제로 시작했다가도 파고들면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가지를 뻗어 가기도 한다. 나처럼 어렵다고 징징거리는 친구도 있고, 웬만한 책은 막힘없이 읽고 도움을 주는 친구도 있다. 정기 모임에서는 발제자가 발표한 후, 돌아가며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완독한 사람도 있고, 절반쯤 읽고 오는 사람도 있고, 책은 읽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서 오는 사람도 있다. 말이 느리거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조금 더 인내심이 필요하다. 반대로 딱 요점만 골라 오 분 안에 발표를 끝내는 친구도 있다.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의 면면을 지켜보는 일이 책을 읽는 것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재미있다. 같은 책에서 이렇게까지 다양한 반응(response)이 나오는구나 싶어 놀라기도 하고, 내 좁은 생각의 범위를 조금씩 넓힐 수 있어서 모임이 끝나면 늘 흡족한 기분이 든다.


산행도 독서토론방 친구들 덕분에 시작했다. 독서와 등산은 닮은 점이 많다. 책도 처음 몇 장은 지루해도 참고 읽어야 비로소 재미를 알아가듯, 산길도 들머리에 들어서서 삼십 분 정도는 묵묵히 걸어야 몸이 풀린다. 숨을 고르고 나면 비로소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사진을 찍을 여유도 생긴다. 처음에는 가벼운 책을 읽다가 조금씩 더 도전적인 책을 찾게 되듯, 동네 뒷산을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더 높은 산에 가고 싶다.


이번에 우리는 북한산 족두리봉에 올랐다. 불광역에서 만나 아파트 단지를 지나 들머리에 들어섰다. 올라가는 길은 암릉이라 발목과 발에 힘을 단단히 주고 걸어야 했다. 아찔한 구간도 있었지만, 우회로가 있고 바위로 된 길이 길지 않아 금방 족두리봉 표지판을 만났다. 어려운 책을 서로 도우며 읽듯이, 누군가의 걸음이 느려지면 누군가 멈춰 서서 기다렸고, 길잡이는 앞서가며 더 쉽고 편한 길을 찾아 안내했다.

우리는 요즘 읽고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보르헤스 같은 중남미 작가들 이야기를 했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 보르헤스가 사랑한 구절,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묘비명을 인용한다. 나는 이 한 문장의 매력에 이끌려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Ficciones)》을 펼쳤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그대로 덮어 버린 적이 있다. 수수께끼 같고, 미로 같은 책이었다. 내가 어렵다고 하자, 친구들은 “통상적인 소설의 범주를 넘어선 보르헤스 소설, 아니 에세이에 가까운 세계”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추천한 해설 강의 몇 편을 듣고 다시 읽으니, 적어도 그가 무엇을 실험하고 있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보르헤스의 세계는 여전히 쉽지 않다.

족두리봉 근처에는 화강암이 풍화·침식되며 생겨난 바위 지형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주변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듯 우뚝 선 큰 바위(토어), 바위판 위에 동그랗게 파인 얕은 웅덩이(나마), 그 웅덩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새긴 길쭉한 바위 골(그루브). 오랜 세월 바람과 물이 깎고 다듬은 이 바위들은, 어느 문학 작품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우리는 자연이 만든 예술품을,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둘러보고 가슴에 새겼다. 한쪽으로는 모처럼 먼지가 씻겨 나간 듯한 하늘 아래, 멀리 반짝이는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 안에서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우리의 세상은 잠시나마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산 위에서, 느닷없이 전쟁을 일으킨 먼 나라 지도자들을 성토하던 우리는 새삼 우리에게 주어진 이 평화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빌었다.


나는 친구들 덕분에 어려운 책에 다시 도전하고, 바위산에 올라섰다. 책은 산이고, 산은 책이며, 책과 산과 친구들이 함께 내 세계를 조금씩 넓혀 주고 있다.


KakaoTalk_20260309_112950246.jpg


금요일 연재
이전 28화시시해지지 않는 풍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