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산 덕봉산
프랑스에서는 600m 이하의 산은 la montagne(산)이 아니라 la colline(언덕)이다. 우리는 높낮이에 상관없이, 모든 봉우리를 그냥 ‘산’이라고 부른다. 맹방 해수욕장과 덕산 해수욕장이 만나는 바닷가에는 100m도 되지 않은 얕은 산, 덕봉산(약 53.9m)이 있다.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와 흰 파도가 몰아치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이어진 모습을 정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낮은 산을 굳이 산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
동해안 일부는 그동안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철조망이 해안을 따라 길게 둘려 있고, 바위 끝 초소에는 군인이 인형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적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하고 낯선 바다였다. 이제는 인공위성이나 드론 같은 기술이 발달해 철조망의 뾰족한 가시는 소용을 잃었다. 초소에는 군인 대신 카메라가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그동안 비경을 꼭꼭 숨기고 있던 바다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열렸다.
‘초곡 용굴 촛대바위길’은 파도가 하얀 거품을 내며 후려치는 바위 위에, 90억이라는 큰돈을 들여 만든 길이다. 출렁다리를 건널 때 투명 바닥을 내려다보면 바다 위를 직접 걷는 느낌이다. 촛대바위, 사자바위, 피라미드 바위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했다. 초겨울 바람이 높은 산맥을 넘어오며 한결 부드러워졌고, 맑은 햇살을 받은 바다는 순하게 반짝였다. 죽은 뱀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더니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동굴에는 시퍼런 물이 쉼 없이 드나든다. 우리는 이렇게 좋은 바다를 그동안 보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며,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걸을 때마다 새로 열리는 풍경에 감탄했다. 촛대바위길 입구의 작은 포구 초곡항에는 햇볕과 해풍으로 말리는 생선이 먹음직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초곡항에서 차로 15분쯤 북쪽으로 가면 섬 산 덕봉산이 있다. 이곳 또한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드나들지 못하던 군사 통제구역이었다. 이제는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해안을 따라 도는 둘레길을 통해 산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덕봉산으로 이어지는 마읍천 하구의 구불구불한 나무 외다리는 골동품처럼 귀하게 보여, 발을 딛고 건너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다. 산에는 상록수와 대나무가 가득해, 겨울에도 파란 바다와 경쟁하듯 짙푸르다. 우리가 오른 산들 가운데 가장 낮은 산이 아닐까 하며 오르기 시작했는데, 서쪽으로는 웅장한 태백산맥의 능선이 아득하게 겹겹이 보이고, 눈앞에는 바다가 짙고 푸르게 펼쳐져 있어 낮은 산이라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졌다. 바다 쪽으로 난 둘레길은 조금만 파도가 높아져도 금세 쓸려갈 것처럼 바다와 가깝다. 누런 바위는 거친 파도에도 마모될 줄 모르고, 여전히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채 서 있다.
비수기의 맹방 해수욕장 식당은 거의 문을 닫아서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가게 밖 간이탁자에 앉아, 나무로 된 외다리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덕봉산까지 이어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산에 있는 대나무 이파리가 메두사의 머리칼처럼 한꺼번에 흔들렸다. 편의점 직원에게 여기서 온종일 이 풍경만 보고 있어도 좋겠다고 하니, 매일 보면 지루할 뿐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이곳에 손님들이 뭘 보러 오는지 궁금해요. 여기가 정말 그렇게 좋아요?” 하고 되물었다. 일상은 위대하지만, 일상이 된 풍경은 너무 쉽게 시시해진다.
이덕무는 “시인이나 문인이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시 쓰는 어깨에선 산이 솟구치고, 읊조리는 눈동자엔 물결이 일어난다. 어금니와 뺨 사이에서 향기가 일고, 입과 입술에선 꽃이 피어난다”고 했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바람이 잔잔하게 파도를 밀어 올리는 동해안의 이런저런 길 위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나는 조선의 문인이 남긴 이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길 위에서 몇 번이고 ‘어깨에서 산이 솟구치고, 눈동자에 물결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맛보았다. 이 풍경은 도무지 시시해질 수 없는 세계였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