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장.
“자, 한 잔 마시자.”
진영이 내미는 잔에 준영도 자기 잔을 부딪쳤다.
점심 식사로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여 먹는 그들이었다.
“야, 여기는 비싸 보인다.”
그러나 진영은 준영의 말에 신경도 안 썼다.
“내가 이사 도왔으니까, 이건 형이 사.”
“알았다.”
준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진영은 다시 소주를 한 잔 쭉 마시더니, 준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
“형, 살았던 이야기나 더 해 봐.”
준영도 한 잔을 주욱 마셨다. 이제 슬슬 취기도 올라오고 농담도 할 자신이 생겼다.
“내 이야기는 소줏병을 앞에 놓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야. 알겠어?”
“하하하!”
“고등학교 1 학년 때인데……. 원래 처음 학교 가면 그런 거 있잖아. 애들이 서로 힘 자랑하는 거. 간단히 말해서 내가 센가, 네가 센가 하는 거. 그런 거 있잖아. 너는 잘 모르겠지?”
진영은 왜 이러시냐는 눈빛을 하며 다시 술잔을 들어 마셔버렸다.
“형, 왜 이래? 싸움은 나도 몇 번 해 봤어. 무시하지 마.”
그러나 준영은 그런 진영의 말을 그냥 무시했다.
“옆 학교가 그동안 좀 잘 나가는 학교였는데 말이야. 우리 학교 애들이 맨날 얻어맞고 다녔던 거야.”
“그래서?”
“1 학년 딱 들어가니까……. 선배들이 찾아 오더라. 내가 중학교 때부터 소문이 났었거든.”
준영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와! 형 잘 나간 모양이네.”
“어느 날, 날 잡아서 옆 학교 애들하고 단체로 붙기로 한 거야. 거의 열 명 이상씩 나갔거든. 무기는 안 쓰기로 하고.”
이제 진영은 준영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방방 날라 다녔지. 대여섯 명째 패고 있는데, 갑자기 한 놈이 칼을 꺼낸 거야. 그걸로 2 학년 선배를 찔렀어. 순간 눈이 돌아가더라. 그래서 다짜고짜 다가가서 발로 차 버렸지.”
진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준영은 더욱 더 차분해져만 갔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발로 차니까 벌렁 넘어가더라. 근데, 거기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왜? 뭘 어떻게 했길래…….”
준영은 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엎어진 놈 팔을 잡아서 팔꿈치 관절을 꺽어버렸어.”
“뭐?’
진영의 두 눈이 커지더니,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 사람은 병신이 되었겠네?’
준영은 다시 소주를 한 잔 마셨다.
“그랬을 거야.”
진영은 준영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둔 거야?”
“아니. 그거 아니고……. 아버지가 돈으로 무마시켰어. 몇 천만 원 들었을 거야.”
준영은 아버지, 최종환이 떠올랐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그 학생 부모 앞에서 쩔쩔매면서 고개를 조아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그 사람은 칼로 찔렀잖아? 그건 어떻게 됐어?”
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아마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야. 내 기억이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왜 팔을 꺽은 거야?’
진영의 물음에 준영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몇 번 눈을 깜박거렸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뭐? 팔? 아, 그거. 칼을 썼잖아. 비겁하게시리. 그래서…….”
* * *
“예, 아버지. 아버지 말대로 사업에 대해서도 배우겠습니다.”
병승은 공손히 아버지 손진태에게 고개를 숙였다.
“좋아, 아주 좋아.”
진태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일단 사무실 하나 하고, 상무 직함을 줄테니, 한 번 해 봐라.”
“예, 상무요?”
“무슨 상무가 대수라고…….”
병승은 소파에 앉으며 진태를 보았다.
“병승아, 상무는 말이야, 그냥 있는 거야. 이 회사는 내가 다 결정하니까, 너는 그냥 시키는 거만 해라.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예.”
병승의 얼굴에 실망이 살짝 보였으나, 진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 * *
교무실 문이 열리며,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어, 이선호 선생님! 이제 출근하세요?”
문 옆에 서 있던 강미정 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선호는 강미정에게 인사를 하며, 교무실 안쪽으로 들어와, 최선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최선경은 이선호에게 눈길도 안 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선경의 눈 앞에 캔커피 하나가 슬쩍 밀려왔다.
그제야 선경은 고개를 들어 이선호를 보았다.
“이게 뭐에요?”
이선호는 교무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선경에게 속삭였다.
“제 마음이에요.”
“그래요?”
선경은 캔커피를 따더니, 주욱 마시기 시작했고, 이걸 본 이선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 선생님, 오늘 저녁에 식사라도 할까요?”
선경은 대답을 하지 않고, 커피를 끝까지 마셨다. 다 마신 캔을 내려놓더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이선호 선생님.”
“네.”
“저기요, 있잖아요. 오늘은 바빠서 안되겠습니다.”
그래도 이선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이라도……. 아니, 이번 주말에라도…….”
“그게 말이죠. 주말에는 오빠를 만나기로 해서…….”
“그렇군요? 제가 오빠 분도 같이 만나도 됩니다만…….”
“이선호 선생님! 상당히 적극적이신 거는 좋은데, 우리 오빠가…….”
이선호의 마음이 급해졌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한 턱 내겠습니다. 어차피 봐야 될 사람이라면…….”
선경은 피식 웃어 버렸다.
“오빠가 사채업자인데……. 괜찮겠어요?”
선경의 말을 들은 이선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인지…….”
“우리 오빠가 실은 건달이에요. 모르셨어요? 저, 여기도 오빠가 넣어준 거에요.”
이선호는 이제 완전히 마음이 최선경에게서 달아나고 말았다.
“저, 수업이 있어서 이만…….”
이선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선경은 혼자 속으로만 웃었다.
* * *
띵동! 띵동! 띵동!
연거푸 세 번 벨이 울리자, 진영은 짜증이 났다.
“대체 누구야? 어떤 새끼가 이따위 매너야?”
큰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현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래, 이따위 매너다. 어쩔래?”
문을 밀고 들어온 이윤영을 보자, 이진영의 얼굴이 하얘지고 말았다.
“윤영아…….”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어?”
진영은 윤영의 앞을 막아섰다.
“윤영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막 들어오면 안 되지?”
그러나 윤영은 진영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준영을 발견했다.
“누구야?’
진영은 아무 말도 안 했으나, 준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윤영 쪽으로 돌아섰다.
‘헉’
윤영은 입으로 손을 막으며, 두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준영이 윤영에게 인사를 했다.
“오빠…….”
윤영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나왔다. 윤영은 엄마 미현에게 들었던 친오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다. 진짜로 얼굴이 진영과 너무나 똑같았다.
“오빠!”
윤영은 뛰어와 준영에게 안겼고, 그런 윤영을 준영은 어색하게 안았다.
진영은 뒷머리만 긁으며, 현관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윤영은 정신을 차린 듯, 준영에게서 빠져나와서, 다시 준영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와! 진짜 똑같다, 똑같애. 그냥 보면 몰라볼 거야.”
진영이 다가와 윤영의 어깨를 잡더니, 소파에 윤영을 주저앉혔다.
“야, 숨 좀 돌리자. 너는 항상 이래. 내가 이래서…….”
윤영은 멍하니 소파에 있다가,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
“야, 이 나쁜 오빠야! 내 택배 내놔!”
윤영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다.
그러자 준영은 벌떡 일어나, 진영이 준영의 방이라고 정해준 데로 들어가더니, 네모난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상자를 윤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윤영은 거칠게 상자를 뜯더니, 내용물을 꺼냈다.
빨간색 브라와 팬티 세트가 튀어나오자, 준영과 진영은 얼굴을 돌렸다.
“왜? 오빠들아, 여자 속옷 처음 봐? 다 알면서…….”
윤영은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이거 내가 얼마나 사려고 했던 건데……. 어이구, 이쁜 내 새끼들, 이제 왔어?”
윤영은 브라와 팬티에 얼굴을 부볐다. 그 다음 공중에 빙빙 돌렸다.
이걸 본 준영과 진영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진영아!”
준영이 부르자, 진영은 일어나 주방으로 가더니 냉장고에서 큼지막한 막걸리를 한 병 꺼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유리잔 두 개를 챙겨서 소파 앞 탁자에 놓았다.
이제 준영과 진영은 막걸리를 마시고, 윤영은 놀란 눈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오빠들, 지금 뭐 하세요? 하나 뿐인 동생 앉혀놓고…….”
“여자 팬티를 봤더니 흥분되서 그런다. 어쩔래?”
진영이 윤영에게 쏘아붙였다.
“오호라, 그러셔? 흥분이 되셔?”
“윤영아, 너 태권도 3 단이라고 함부로 나대지 마라. 여기 준영이 형은 조직에 계셨던 분이야.”
진영의 말에 준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윤영의 눈빛에 호기심과 경외심이 떠오르더니, 준영의 손을 잡았다.
“오빠, 오늘 처음 보지만, 왠지 오랫동안 봐 왔던 것 같아. 반가워.”
준영은 오늘 처음 본 친동생의 얼굴을 보며 막걸리가 채워진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