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장.
손병승은 아버지 손진태가 마련해 준, 태화 투신의 제일 꼭대기층에 있는 상무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창 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보면서 붓을 천천히 놀리던 병승은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자 화들짝 놀랐다.
“손 상무, 뭐하고 있는가?”
병승은 뒤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진태는 병승의 그림을 보면서 감탄을 했다.
“음, 잘 그리기는 잘 그리는구나. 참, 내가 말한 그 거래는 처리했냐?”
병승은 진태의 말에 그제야 중요한 거래가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병승은 얼른 일어나 책상으로 가서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진태도 옆에 와서 같이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아빠, 지금 클릭할까요?”
그런데 진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챈 병승은 진태의 얼굴을 보았고, 거기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노기를 발견했다. 병승은 다시 화면을 보았고, 이미 그래프는 내려가고 있었다. 단 두 시간 전에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병승아, 거래는 실패다. 지금 팔면 얼마를 손해보는 줄 알기는 하는 거냐?”
진태의 화난 음성이 병승의 귀를 때렸다.
“아무래도…….”
병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의자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림을 회사에서는 그리면 안 되겠다.”
진태의 결정은 내려졌고, 병승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하루종일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기가 힘들면, 책이라도 좀 보아라. 그래야 선물이 뭔지 그리고 거래가 뭔지 알 것 아니냐?”
진태는 병승의 어깨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알겠습니다.”
집에서처럼 아빠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이 병승을 슬프게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두 시간 전에만 해도 몇 억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몇 억을 날릴 판이었으니까. 병승은 자신의 실수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이런 거에 안 맞나?’
진태는 병승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말을 했다.
“이것도 그림처럼 자꾸 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 알겠지? 지금 이 모니터 저편에는 수 십 아니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우리처럼 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 그들이 버느냐, 내가 버느냐, 딱 두 가지 경우 뿐이다. 그외에는 없어.”
“휴, 힘들군요.”
“간단히 생각하렴. 오늘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그리고 내일도 먹을 수 있을지만 생각해라. 쪽박 차는 거 시간 문제다. 한 건의 클릭 잘못으로, 당장 오늘 저녁을 굶을 수도 있단다.”
“아빠, 그렇게 겁주지 마세요.”
진태는 아예 소파에 앉아버렸다.
“너, 내가 그 회사에서 나올 때 얼마 가지고 나왔는지 말을 안 했지?”
병승은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회사 그만둘 때, 10 억 가지고 나왔다. 10 억이면 큰 돈이지.”
진태는 과거의 회상에 젖어들었다.
“단 6 개월 만에 5 억 날렸다. 반토막 난 거지.”
“예?”
병승의 입에서 놀랐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때 나도 깨달은 거야.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말이야.”
병승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자, 또 하나 가르쳐 줄까?”
“예.”
시무룩한 목소리로 병승이 대답을 하자, 진태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병승을 돌아보았다.
“나가자. 나가면서 얘기하자.”
둘은 그대로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갔고, 거기서 병승은 다시 질문을 했다.
“뭔데 그래요?”
“한 번 지나간 일은 바로 잊어라. 그거 잡고 있으면 다음 거래를 못 한다. 이게 정말 중요한 거야. 실패한 거래에 목매다간 바로 망한다. 절대 손해를 만회하려고 하지 마라. 지금 거래에서 이익을 볼 생각만 해라. 그리고 손익은 퇴근하면서 따져라. 그 영화 대사도 있잖니. 내일은 또 다시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
“저도 알아요.”
병승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나도 알아. 네 엄마가 그 여주인공 좀 닮지 않았냐?”
“말도 안 돼요. 비비안 리가 얼마나 예쁜데……. 차라리 소희가 닮으면 닮았지…….”
“집에 가서 얘기 좀 해라. 내 점수 좀 따야겠다. 네 엄마한테…….”
“네.”
* * *
“예,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시죠?”
준영은 종환의 전화를 받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요새 통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잘 지낸다. 너는 어떠냐?”
“예. 그런대로 잘 지내요.”
“회사는 잘 나가고 있냐?”
“예?”
준영은 종환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선경이가 그러더라. 너 만났더니 회사 들어갔다고 하던데…….”
준영은 얼른 다음 말을 생각해 냈다.
“아, 그거요. 그거 말하지 말라 했는데…….”
준영의 둘러댐에 종환은 깜박 속았다.
“하하, 그런 걸 숨길 필요가 있냐? 어때? 친부는 잘 해주시냐?”
준영은 점점 얘기가 이상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영이 녀석이 선경이를 만났구나.’
“예, 잘 해 주세요. 좀 서먹서먹하기는 하지만…….”
‘진영이는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야?’
“아무래도 그러겠지. 20 년 넘게 안 봤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살갑게 되겠냐?”
“예.”
“잘 다녀야 한다. 처음부터 높은 자리 달라고 하지 말고, 밑에서부터 차근차근히 올라 가야 한다.”
“예.”
“그럼 끊자. 그런데 언제 집에 올래?”
“아버지, 조만간, 이번 주에 들를께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준영은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선경이를 만나고 있기는 하구나.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지? 둘이 잘 되나? 모르겠다. 휴, 정말 인생이 꼬인다 꼬여.’
* * *
송영구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의 표정에 싸늘한 표정이 떠올랐고,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법무실장실 공기마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상원이라…….’
영구는 폰을 꺼내,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송영구요.”
“예? 누구시라고요?”
“나, 아리랑의 송영구요.”
전화기 저편에서 아무 말도 없자, 영구는 다시 말을 했다.
“최준영 일로 우리가 얽힌 적이 있습니다만,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기억합니다. 어쩐 일로…….”
“한 번 만납시다.”
“까짓 거……. 그럽시다.”
영구는 전화를 끊은 다음,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심각한 일을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 * *
“그런데, 오빠, 오늘은 이상하네? 별 말도 없고…….”
진영은 선경과 팔짱을 낀 채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둘은 그대로 1 층의 커피숍으로 발길을 옮겼다. 커피를 두 잔 주문한 다음, 진영은 선경을 똑바로 보았다.
“너, 법에 대해서 조금 아냐?”
선경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만 흔들었다.
“아무리 입양했어도, 그리고 그 입양을 깨도, 남매였던 사람은 결혼 못 한다더라.”
선경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오빠, 그런 건 어디서 알았어?”
“…….”
“그럼 우린 결혼 못 하는 거네? 오빠가 다시 원래 집으로 돌아가도…….”
“그렇지.”
선경은 실망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고, 그런 선경을 진영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진영은 잔을 내려놓은 다음, 손을 뻗어 선경의 손을 잡았다.
선경은 진영이 손을 잡자, 그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선경아,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어.”
선경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뭔데? 그게 뭐야?”
“참, 말하기가 난감한데…….”
“오빠, 난 뭐든지 참을 수 있어.”
진영은 선경의 손을 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피숍의 누구도 여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임신을 하면 된데.”
선경은 손으로 입을 막았고, 그 눈은 커질대로 커지고 있었다. 마치 그 무슨 미친 소리야 하는 것만 같았다.
“이게 말이야. 형부와 처제였던 경우와도 비슷하데. 변호사가 그러더라.”
선경은 천천히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두 눈에 비장함이 서리고 있었다.
“오빠, 나랑 결혼하고 싶어?”
선경은 준영에게 한 말이었지만, 진영은 그 말을 자기에게 했다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래.”
그리고 진영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오늘 밤?”
“그래.”
진영은 조용히 말을 했고, 선경의 얼굴은 점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카드키를 꽂자 호텔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진영은 선경이 먼저 들어가도록 배려했다.
“와, 정말 좋다. 이게 스위트 룸이야?”
“그래. 그때 펜트하우스보다야 못하지만…….”
선경은 펜트하우스보다 못하다는 진영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준영이 펜트하우스를 예약했을 리가 없을 텐데, 선경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선경은 핸드백을 거실 탁자에 내려놓았다. 뒤에서 진영이 다가와 선경을 안았다. 선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선경의 모든 것을 각오한 느낌이 진영에게 전해져 왔다. 진영은 선경을 천천히 돌려세웠다. 바로 눈 앞에 선경의 얼굴이 있었다. 진영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진영은 선경의 턱을 손으로 올렸다. 선경의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조그마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진영은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고, 선경은 진영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선경은 입술을 뗀 다음, 진영의 눈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오빠, 기억 나? 그 시계 말이야.”
“응, 뭐?”
진영은 선경의 양 어깨를 잡은 채 선경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시계 사줄 때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그러나 진영은 준영이 아닌지라, 선경의 말에 그냥 둘러대기만 했다.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인생에서 만나기 힘든 여자.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 이건 나쁜 거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결혼만은 내 의지로 하고 싶어.
진영의 머리 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내가 뭐라 했어?”
커피숍에서 그리고 호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 때의 선경의 얼굴은 완전히 긴장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아주 환한 표정이었다.
“…….”
선경은 진영이 말이 없자, 진영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오빠, 어서 말해봐.”
선경은 진영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결혼하자고 했잖아. 안 그래?”
진영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 순간 선경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어깨를 잡고 있던 진영의 손을 잡아서 밑으로 내렸다.
진영은 속으로 ‘내가 틀렸나?’ 하고 생각했다.
선경은 희부연 호텔 형광등의 조명 밑에서 진영의 얼굴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눈에 이건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선경은 손을 뻗어 탁자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당신……. 오, 이런, 당신, 진영 오빠군.”
선경의 얼굴에 놀람이 퍼지면서, 이제야 진실을 알아차렸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경아…….”
“대체 왜 이런 짓을…….? 왜 준영 오빠 행세를…….”
선경의 눈이 호텔 방문을 향했다. 그 눈에는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선경아…….”
선경은 옆으로 살살 걸었다. 진영을 피해서 호텔 방문 쪽으로.
“너를 사랑해.”
“안 돼.”
선경은 날카롭게 말하고, 순간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렸다.
진영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고, 선경은 문을 열다 말고, 그 자리에 멈췄다. 뒤를 돌아본 선경은 입을 열었다.
“준영 오빠도 알고 있어?”
이제 진영은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 선경에게서 준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
진영의 말에 선경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다 죽어 버려!”
선경은 호텔이 떠나가도록 악을 썼다.
“다 죽어 버려!”
문이 쾅 닫혔고, 복도를 뛰어가는 발소리만이 멀어져 갔다.
진영의 마음은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고, 몸도 따라서 스위트 룸의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진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 *
“하하, 반갑습니다. 저번엔 우리 애들이 실례를 했습니다.”
김상원은 카페로 들어오는 송영구를 반갑게 맞았다.
“별 말씀을. 그거야 우리가 먼저 잘못한 거지요.”
송영구는 자리에 앉으며 김상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괜찮군. 일, 해볼만 하겠어.’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아니지. 먼저 술을 시킬까요?”
“그러시지요.”
“마담!”
술이 두어 잔 씩 들어가자, 김상원은 옆에 합석하고 있던 두 명의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너희들은 나가서 따로 마셔라.”
“네, 형님.”
두 명이 룸을 나가자, 송영구는 바로 옆에 앉아서 술을 따라주고 있던 마담의 손을 잡았다.
“마담, 이렇게 예쁘니 어떡하지요?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호호호, 실장님도……. 그렇게 맘에 들면 유혹하세요.”
영구는 마담의 손을 조물락거리더니, 귀에 대고 뭐라 말했다. 그러자 마담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럼 두 분이서 드세요.” 하고 룸을 나갔다.
“뭐라 했습니까?”
“별 거 아닙니다. 이따 다시 부른다고 했습니다.”
“자, 그럼 용건을 말씀하시죠.”
“그쪽도 세상 물정은 다 아시는 분이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백 억을 빌렸으면 합니다.”
김상원은 백 억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아니, 이 사람이…….’
“실장님, 저는 일개 부장일 뿐입니다. 어찌 저한테 그런 거금을 말씀하십니까?”
“부장님 아버지께서 이사장이란 걸 제가 모르고 여기 왔을까요?”
그제야 상원은 일이 돌아가는 정황을 알았다.
‘다 알고 왔구나.’
“태원 새마을 금고의 김태원 이사장님 아들이 김상원 부장님 아닙니까?”
상원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은 강하다. 앞으로 알아두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 법무실장님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빈 말은 아니시겠고……. 그럼 기한과 이자는 얼마로…….”
“기한은 한 달. 이자는 10 퍼센트.”
“더 하실 말씀이라도…….”
상원은 한숨을 쉬었다.
“백 억이 된다면 마담을 부를 것이고, 안 된다면…….”
“안 된다면?”
“내가 술값을 내겠습니다.”
영구의 술값을 내겠다는 말은 지금 이 자리를 파하자는 뜻이었고, 상원은 바로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