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장.
“회장님! 사모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전갈과 함께 회장실 문이 열리면서, 미현이 들어왔다.
현석은 송영구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 당신이 왠 일이야?”
“점심 같이 먹으려고 왔어요.”
미현은 생긋 웃으며 말했고, 영구는 말을 하다 말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 지금 한참 바쁜데…….”
“기다리겠어요.”
미현은 회장실 한쪽 구석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핸드백을 열더니 폰을 꺼내 들었다.
이 모습을 본 현석은 다시 영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주식을 처분하기로 하지. 회사 경영권에 필요한 만큼만 놔두고 말이야.”
“회장님, 그렇게 하면 아마 돈이 들어오기는 할 겁니다. 문제는 언제 파느냐와 얼마에 파느냐입니다.”
현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고, 영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쁜 건 알지만, 일단 주가를 좀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한 푼이라도 더 생길 테니까요.”
“송 실장, 그건 말이야……. 상당히 위험하단 말이야.”
“제가 아는 선이 있습니다. 먼저 주식을 사고자 하는 수요를 증가시켜 놓으면 주가는 올라가게 마련이지요. 일 이 주 정도 올려 놓은 다음, 주식을 팔면 못해도 몇 억에서 몇 십 억 정도는 더 나올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석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영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영구는 돌아서 문으로 가다가, 생각이라도 난듯이 미현을 보았다.
“사모님, 그럼 저는 가겠습니다.”
“실장님, 점심은 누구와?”
“저는 약속이 있습니다.”
* * *
“오랜만에 다 같이 외식을 했네. 그것도 점심을 말이야.”
진태는 정화와 나란히 앉아서 앞에 앉아 있는 진영과 혜정을 보았다.
“예, 회장님.”
진영은 살짝 고개를 숙여 진태에게 인사를 했고, 혜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아빠, 요새 우리 잘 지내고 있어요.”
혜정의 말에 정화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구나.”
“진영아, 여기 음식 괜찮지?”
정화는 일부러 진영에게 말을 걸었다.
“예. 아주 잘 먹었습니다.”
진태는 입을 닦던 티슈를 식탁에 놓더니, 진영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 잘 지낸다? 그럼 슬슬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겠구나.”
“아빠, 아직 빨라요.”
혜정은 진태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진영이 생각은 어떠냐?”
진태는 진영에게 물었고, 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했다.
“저도 혜정 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직 빠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회사가…….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회사가 개편을 하는 중이라서요. 제가 이것 때문에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진태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정화의 눈만 동그래졌다.
“진영아, 회사가 힘드니?”
정화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나왔다.
“아니요. 힘든 건 아닌데……. 아버지가…….”
진태는 손을 들어 진영을 제지하고, 정화를 보았다.
“자, 자, 이런 얘기는 그만 두고. 우리 후식으로 커피 한 잔 하러 갈까?”
“예, 아빠. 좋아요.”
혜정은 밝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준영 오빠, 여기야.”
선경은 환하게 웃으며, 진영을 반겼다.
“내가 좀 늦었지.”
진영은 준영의 행세를 하면서부터, 약간 말을 느리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평소 준영이 하는 말투를 따라 하려다 보니, 너무 빨리 말하면 자기의 습관이 나올까 봐 항상 조심하는 진영이었다.
“어때? 회사 다니는 거?”
“좋아.”
역시 준영이 하는 말투처럼 짧게 대답을 하는 진영이었다.
“선경아, 먼저 주문부터 하자.”
“요새 자꾸 엄마 아빠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서 아주 힘들어.”
선경은 진영에게 투정을 부렸고, 진영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시계는 이제 버리고 새 걸로 사줄까?”
선경의 말에 진영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니. 난 이게 좋아.”
선경은 진영의 말에 감동하였고, 너무나 행복한 눈빛으로 진영을 보았다.
그런 선경을 보는 진영 역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이런 것이 행복이야.’
“부모님이 결혼 이야기 하면, 뭐라고 했어?”
선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게 말이야. 오빠가 좋다고 했더니, 남매라서 절대 안 된데.”
‘그럼, 절대 안 되지.’
진영은 속으로만 생각을 했고, 얼굴에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랬구나. 선경이 마음이 아팠겠네?”
진영은 선경을 슬쩍 떠 보았고, 여기에 선경은 걸려 들었다.
“오빠가 다시 친부모에게로 돌아가면 되잖아, 안 그래?”
진영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음, 이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진영은 준영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 하면 돼. 내가 잘 하면…….’
“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고, 우리 걸을까?”
“좋아.”
선경은 진영에게 팔짱을 꼈고, 둘은 연인처럼 거리로 나섰다.
“가을 날씨가 점점 추워지네.”
선경은 찬바람이 불자, 어깨를 움츠렸고, 진영은 입고 있던 반코트를 벗어 선경에게 씌워 주었다. 그 다음 자신이 선경에게 팔짱을 꼈다. 둘은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는 강남의 거리를 걸었다.
* * *
“어쩐 일입니까? 저를 다 보자고 하시다니.”
영구는 흐릿한 조명의 카페로 들어서면서, 준영에게 말을 걸었다.
준영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다.
“여기는 제가 잘 아는 곳입니다.”
영구는 카운터로 가더니, 마담을 불러냈다.
“실장님, 그동안 통 안 오시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습니까?”
“마담, 오늘은 정말 조용한 방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안 들어와야 하고.”
“호호호. 그러면 여기가 제격이죠.”
마담은 영구에게 은근슬쩍 눈웃음을 날리며, 준영과 영구를 카페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금장으로 장식이 된 검은 색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연 마담은 전등을 켜더니,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실장님, 주문은?”
“평소 제가 하던대로 주세요.”
“호호,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마담이 나가자, 영구와 준영은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가 다 탈 무렵이 되자, 다시 문이 열리며, 젊은 웨이터가 카트에 양주 한 병과 안주 두 접시를 밀고 들어왔다. 과일 안주 하나와 마른 안주 하나가 테이블에 놓여지고, 양주 한 병이 영구의 앞에 놓였다.
영구는 술병을 열어, 잠시 향기를 맡아 보더니,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라, 하나를 준영의 앞으로 밀었다.
“술이 슬슬 올라옵니다.”
영구는 담배를 꺼내 피워물며 준영의 눈치를 살폈다.
“실장님, 회사는 별 일 없습니까?”
“예. 실은 별 일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조직 개편을 하고 계십니다만……. 왜 그러시죠?”
준영은 회사 일에 관심이 없는 걸로 영구는 알고 있었고, 더구나 준영을 시골로 농사 지으러 보낼 거라는 현석의 언질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조금 의아해졌다.
“친부가 저에게 시골로 가라고 했습니다.”
“예.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마 그 얘기를 하려고 저를 보자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준영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끄고, 다시 술을 한 잔 마셨다.
“제가 손혜정이 좋아졌습니다.”
영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상무님은?”
“진영이는 손혜정 씨가 싫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 볼 때부터 혜정 씨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진영이와 얘기한 끝에, 제가 한 번 사귀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시나요?”
“저는 실장님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제가 다시 원래의 부모에게로 돌아갈 수 있나요?”
영구는 머리 속에서 친족에 관한 법률과 상속에 관한 법률을 끄집어 내었다.
“글쎄요. 저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준영은 잠자코 영구의 얼굴만 보았다.
“아무리 입양이라도 해도, 법적으로는 부자지간이 되는 것이므로, 이걸 파기한다? 쉬운 문제는 분명 아닙니다.”
“그렇군요.”
“손혜정 씨와 사귀는 데 있어서, 그런 것이 문제가 됩니까?”
준영과 영구는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제가 위치가 조금 더 나아지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쪽은 부자집 딸이고, 저는 아무리 친부라지만, 그래도 정식 아들은 아니잖아요.”
영구는 준영을 천천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뜻밖이었다. 다시 자기 부모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되었으나, 그것이 여자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아니 상당히 이상했다.
‘혹시…….’
“준영 씨, 혜정 씨와 두 분이서 무슨 약속 같은 거라도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준영 씨가 아리랑의 후계자가 되면, 혜정 씨가 결혼을 한다던지 그런 거 말입니다.”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그런 얘기는 안했습니다.”
‘아직 안 했다? 그럼 만난 적은 있는 거네. 만나서 둘이 뭐라 얘기도 했고. 상무님은 이걸 알고 인정하는 것 같고.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구나.’
“그럼, 손혜정 본부장님은 준영 씨에게 어떤 말을 했습니까?”
“어떤 말을 한 건 아니고…….”
준영은 말을 흐렸다. 혜정과의 그 사건을 영구에게 털어놓는 것이 좋을까? 아니야. 그건 말도 안 돼.
“제가 이해하기론 준영 씨와 손혜정 씨, 두 분이 뭔가 모종의 관계가 생겼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군요.”
“예.”
준영은 솔직히 시인했다. 아직 손혜정의 마음은 사건의 진실을 모르지만, 손혜정의 몸은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일단 저는 준영 씨 편입니다. 이 점만 기억해 두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준영은 영구에게 잔을 내밀었고, 둘은 잔을 부딪친 다음, 단숨에 마셔버렸다.
‘음, 그럼,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건가?’
진영과 혜정의 관계가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손혜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송영구로서는 이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손혜정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으며, 손혜정 또한 자신에 대한 감정이 좋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송영구는 이제야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인식이 되었다.
‘아무리 고시를 패스했다지만, 나는 레벨이 달라.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군.’